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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an 28. 2019

말모이 이야기 (7) - 문예봉~동학당

- 신성한 말 17 - 문예봉 - 임선규 - 동학당

[영화 말모이를 보았다. 중2, 초6인 두 딸[현서, 현빈]과 함께. '신성한 말'을 이야기하는 나로서는 꼭 보아야 할 영화였다. 감동하며 보았고, 할 이야기가 많다. 아무래도, 거듭해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중 일곱 번째


1. 문예봉이라는 이름 

대동아극장으로 바뀐 옛 동양극장에 다시 취직한 김판수 .. 이 극장 최고의 배우가 문예봉이다. 


영화의 막바지 무렵, 조선어학회가 일시적이나마 파국을 맞이하고

김판수는 류정환과 헤어져 본래 일하던 극장-동양극장-에 표받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명성을 떨친 <동양극장>은 <대동아극장>으로 바뀌어 있다. 

일제가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2차 세계대전]을 도발하던 무렵이다. 


이때, 샌드위치 광고맨 박봉두(조현철 분)가 광고하며 외치는 여배우 이름이 '문예봉'이다. [영화 속 대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지원병' 또는 '신개지' 쯤의 친일작품을 선전하는 대목일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참고하면, 문예봉은 그 시절에 오늘의 'BTS' 급 인기와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문예봉(1917~1999. 본명 문정원)  - DAUM 백과사전>

1930년대 인기 여배우로 활동하다 월북해 북한 영화계를 움직인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북한 최초의 공훈배우이다. 1931년 조직된 극단 ‘연극시장’에 참여하는 등 연극배우로서 활동했고, 1932년 <임자 없는 나룻배>에서 주인공인 뱃사공의 딸 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인기배우로 발돋움했다. 최초 발성영화인 <춘향전>, <아리랑고개>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1946년 남조선영화동맹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월북했다. 월북 후 주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활동했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당시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런 화려한 이력에 오점이 없지 않으니, 영화 '말모이'에 등장하는 문예봉은 바로 이 오점의 시기의 문예봉이다.


문예봉은 일본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선동영화인 <지원병>(1941)·<신개지>(1942)·<망루의 결사대>·<조선해협>(1943)·<사랑의 맹서>(1945) 등에 출연해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위 'DAUM' 백과사전)

포스트 중앙에서 위쪽으로 <동양극장>의 최고 히트작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광고판을 맨 박봉두의 모습이 보인다. 


2. 임선규라는 이름 


이 문예봉의 남편이 '임선규(1910?-1970?)이다. 임선규는 일제강점기를 풍미한 대중극(신파극) 작가로 80여 편을 저술했다. 문예봉과 1933년 결혼하고, 1936년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 전속 극작가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홍도야 우지마라)>(1936)를 썼고, 불후의 히트작이 됐다. 그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 <동학당>(1940)을 연속으로 히트시켰다. 이 <동학당>을 정읍에서 공연할 때는 인근에서 몰려온 관람객들로 배우들이 숙소를 잡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1940년에 김영춘의 노래로 주제가 '홍도야 우지마라'가 나와 본공연만큼이나 인기를 끌었고, 후속편까지 제작되어 흥행을 이어갔다.  


그밖에도 수많은 작품을 썼으나, 그 또한 (문예봉과 함께) '친일'의 들판을 피해 가지 못하였다. 임선규는 일제강점기 말에 몸담은 친일 작품 이력 때문에 해방 이후 한때 절필하며 지냈으나, 남로당 창당대회에서 '긴급동의'라는 선동적 낭송극을 선보이며, 좌익 활동에 가담한다(친일 행적의 면죄부를 받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그러다가 좌우익 갈등이 심화되고, 남한에서 '좌익 검거령'이 강화되자 48년경 월북하였다.  


3. 임선규와 동학당이라는 이름 


오랫동안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임선규의 이름이 1993년 <조선일보>에 다시 등장한다. 그의 희곡 중 특기할 만한 <동학당>이라는 작품의 발굴 소식에서이다. 


"월북작가 임선규 육필 원고/희곡 동학당 40여년 만에 햇빛

- 원로배우 고설봉 씨 간직 전4막 / 41년 첫 공연 인내천 - 민중주체사상 담아 

동학혁명1백주년을 앞두고 식민지시대의 극작가 임선규(본명 임승복)가 동학혁명의 이념과 전개과정을 그린 희곡 <동학당>의 육필원고가 최근 발굴돼 40여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동학당>은 극단 <아랑>이 1941년 첫 공연을 가졌으나 곧 일제의 압력을 받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가 광복 이후 한 차례 재 공연된 뒤 그동안 흔적도 없이 실종됐던 연극이다. (중략) 최근 근대희곡 연구자 이재명 씨(연세대강사)가 원로배우 고설봉 씨가 간직해 온 희곡 원고를 찾아냈다. 특히 이 원고는 작가 임선규의 친필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 희곡 <동학당>은 동학혁명의 발생에서 패배까지를 토태로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그리고 있다. 제1막에서 양반사회의 부패상을 제시하면서 민중들의 분노를 묘사, 동학혁명의 필연성을 제시하고, 2막에서는 동학도의 집회장면과 인내천 사상이 강조된다. 3막에서는 동학혁명군의 승리가 그려지지만, 4막에서는 동학혁명이 일본군에 의해 좌절된 뒤 새 세상이 와야 한다라는 주인공의 외침과 함께 막을 내린다.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전봉준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작품무대도 전라도가 아닌 충청도를 택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전봉준을 위엄 있고 패기 있는 인물로 묘사하고, 동학의 주체를 민중으로 보는 시각을 과감하게 밝힌다. (중략) 

류민영교수(단국대)의 연구서에 따르면, <동학당>은 극단 <아랑>이 황금좌에서 공연, 1주일 만에 4만7천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어느 날은 오후1시부터 네 번 공연해서 하루에 1만7백 명을 동원한 적도 있다. <동학당>을 발굴한 이재명 씨는 "일제강점기에 발표된 희곡 중에서 동학을 제재로 한 것은 김우진의 <산돼지>(1926) 이후로, 조용만의 <가보세>(1931)와 채만식의 <제향날>(1937) 등을 꼽을 수 있다"면서, "그중에서도 동학을 전면적으로 다룬 본격적인 희곡작품으로는 임선규의 <동학당>을 먼저 꼽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략) 

[*(高雪峰.1913∼2001)은 '극단 아랑'에 입단해 <동학당>에도 출연한바 있다.] 


<동학당>은 발굴 직후 한 대학 연극부에서 공연을 한 기록이 보인다(인터넷, 포스터). 



그에 앞서 1966년 작 <군번 없는 용사>(이만희 감독, 신성일 주연)에도, 이 <동학당>에서 모티브(형제간 쟁투)를 얻었다고 하고, '연극으로 보는 한국 근대 연극사의 뒷모습'이라는 부제를 달고 2010년 공연된 <경성스타>에도 '사랑에 속도 돈에 울고'에 이어 이 '동학당' 장면이 등장한다(인터넷 기사). 도봉구 쌍문동 40-12 세광골드타운A동(쌍문파출소 옆) 담벼락에 문예봉, 김선규가 살던 옛집터 표지비가 있다. 


필자(소걸음)는 임선규라는 이름을 최근 '천도교중앙도서관'을 방문한 한 연구자로부터 처음 들었다. 그는 임선규의 원작 <동학>당 희곡을 찾고 있었다. 지금 남아 있는 대본은 임선규 원작이 아니라 해방 이후 재공연될 때, '각색'을 거친 것이라 하였다. [이 작품은 2014년 '지식을 만드는 지식'이라는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그 연구자가 <동학당> 원본을 찾는 이유는 이 작품이 일제강점기, 모두가 친일과 군국주의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와중에 '아마도' 최후로 민족적 정서를 담아 낸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1940년이라는 그 엄중한 시기에 '동학당'의 이름을 내걸고, 혁명의 횃불이 타오른 '정읍'에서까지 폭발적인 호응을 이끌어 낸 공연을 올렸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 내용과 내막을 더 알아보아야겠지만) 참으로 소중한 역사 자산임에 틀림없다. 


4. 동학당이라는 이름 


'동학당'이라는 이름은 본래 동학(東學)을 매우 정치적인 사상이자 혁명운동으로 보고, 동학교단을 가리키는 명칭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동학군'들을 '동학당'이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진보회' 운동을 계속하는 동학 세력을 당시의 신문이나 일본 당국이 '동학당'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던 '동학당'은 1905년 '천도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근대적인 종교 체제를 갖추고 양지로 나왔다. 그러나 1910년 이후 '동학당'은 금기어가 되었다(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천도교는 1919년 3.1혁명을 주도하였고, 그 이후 동학 청년들이 동학당(천도교) 운동의 전면에 나선다. 청년들은 '천도교청년회' '천도교청년당'의 이름을 내걸고 신문화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의 동학(혁명)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던 1928년 천도교청년운동의 일각에서 '천도교청년동학당'이라는 이름으로 단체 등록을 시도하였다. 

"불허!"

일제 당국은 그 이름이 불온하다 하여 불허하고 만다. 그렇게 '동학당'의 이름은 일제강점기 내내 '불온한' 이름의 대명사였다. 

그러던 중 1935년경, 천도교의 사상가인 야뢰 이돈화(猪菴, 夜雷, 1884∼1950)가 '동학당'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탈고하였다. 이 소설은 동학혁명 당시가 아니라, 동학 창도에서부터 해월에 이르는 시기와 그중에서 1870년 전후에 동학 세력이 주도한 '이필제란'을 중심 내용으로 한다. 이 작품도 출간을 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가, 1960년대에 재발굴되어 천도교의 기관지 <신인간>에 연재되면서, 알려졌다.


[최근에 이를 다시 간행하였다.]


5. 역사는 흐른다 


"문예봉 - 임선규 - 동학당 - 동학당"


'동학당'은 한때 부르지도 못하는 '금기어'였으나, 이제 '동학농민혁명'은 국가기념일까지 생겼다. 


역사 속의 그 이름들을 다시 찾아, 새로이 부르는 일은 오늘과 내일을 향한 새로운 길찾기가 아니랴!


(끝) 


[이것으로 '말모이 이야기' 연재를 마치려고 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훨씬 더 많지만, '진도 나갈' 때가 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말모이'라는 영화의 중심주제인 '말모이(사전)' 자체나 인구에 회자되는 명대사 등은 일부러 피해 가려 했다. 연재의 중심이 '신성한 말'이어서 '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옥같은 영화 속 대사들 가운데서도, 주변부나 덜 주목 받는 것 속에서 내 마음을 끄는 것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꼭 해야 할 말들이 더 남아 있어서, 진도를 나가는 중에라도 몇 마디 더 보태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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