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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래 Jul 24. 2024

가마솥에 커피콩 볶다 깨달음

"산에 오른다고 꼭 정상에 깃발을 꽂아야 할까?"

산마을에 조그만 카페를 열었다. 코로나와 같이 시작했으니 벌써 5년째를 맞았다.


문을 열 때 거기서 무슨 카페가 되겠냐며 걱정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코로나도 잘 넘겼고 이제는 제법 유명한 카페로 자리를 잡았다. 촌스러운 외관에 볼품없는 인테리어지만 그런 모습이 좋아 찾는 도시 손님들도 많다.


시작할 때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카페들과 차별화를 위해 투박한 나무로 직접 인테리어를 했다. 주변에 있는 나무판이나 돌에 페인트로 손글씨를 써 붙였다. 캘리그래피 액자가 되고 벽화가 됐다. 음료는 마당에서 기르고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은 것들로 직접 만든 것만 고집했다.


커피도 원두를 직접 구해 가마솥에 볶아 핸드드립만 했다. 커피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시골카페에 어울릴 것 같아 그랬다. 시간이 지나며 손님들이 많아져 감당이 안 돼, 지금은 머신을 쓰지만 처음에는 그랬다.

     

처음 커피를 직접 볶는 게 쉽지 않았다. 불 위에 가마솥을 올려 달구어 원두를 넣고 나무 주걱으로 콩이 타지 않도록 열심히 저어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잘해도 기계 로스팅처럼 고루 일정하게 볶이지 않았다. 불 조절을 못 해 태워 먹기도 하고 덜 볶아지기도 했다.


커피가 볶아질 때 연기가 많이 난다. 커피 향은 좋지만 연기를 마시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바비큐 하듯 야외에 불 피고 볶으면 환기 걱정을 안 해도 된다. 겨울철 기온이 낮을 때나 바람이 불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몇 년 하고 나니 도가 텄다. 잠깐씩 딴짓하며 볶을 때도 있고 불이 제대로 비치지 않는 어두컴컴한 마당에 자리를 펴고 볶을 때도 있다. 태워 먹지 않고 덜 하지도 않게 적당히 잘 볶인다. 물론 기계로 하는 것처럼 고르지 않다.


불 피우고 가마솥을 달구어 원두 볶기를 완성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린다. 그 시간 내 손은 자동으로 주걱을 돌리고 눈은 콩이 잘 섞이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오로지 콩볶기에 집중하다 보면 이따금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





젊을 때, 머리 깎고 절에서 살아볼까 했던 적이 있었다. 무슨 연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좋아 보였고 멋있어 보였다. 참 웃기는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탐진치’가 골수에 깊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아상’을 붙들고 헤매며 살고 있다. 삶에 의심이 생기고 때때로 힘들 때면 다리 꼬고 앉아 스님들처럼 ‘화두’를 잡는 흉내도 내보고, 깨닫고 깊어졌다는 누군가를 만나 따라 명상도 해 봤지만, 나에겐 ‘말짱 도루묵’이었다. 스님을 잡고 물어봐도 목사님을 붙들고 물어봐도 풀리지 않았다. 모르겠다. 오직 모를 뿐이다. 


믿음이 문제였을 것이다. 일단 믿고 끝장을 봤어야 뭔가 풀리는 것이 있고 보이는 것도 생기고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 몸이 붕붕 떠 하늘을 날아다니고, 천리안이 생겨 천리밖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뜨는 것은 고사하고 서 있는 것도 힘들고 천리밖은커녕 제 앞가름 하기도 힘들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믿고 따르지 않은 것, 도를 닦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몇 년간 가마솥에서 커피를 볶다 보니 그 시간이, 화두랍시고 붙들고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보다, 좋은 스승 만나 깨달음의 얘기를 듣는 것보다 더 행복했다. 그게 행복인지 뭔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화두를 깨는 확철은 아니지만, 명상에 드는 기분을 느낀다. "명상이 별 게 아니구나" 하는 시건방진 마음이 일기도 한다. 


명상은 도사가 돼 하늘을 날고 천리안이 생겨 십리 밖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의 얘기였다. 명상이 깊어지면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알아차린 것은 커피콩을 볶는 것이 명상이란 사실이다. 복잡하고 잡다한 생각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

     

커피콩을 볶으면서 할 수 있다면 대문에 페인트칠을 하다가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교회 마당 벤치에 앉아 누굴 기다리는 시간에도 명상을 할 수 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도, 샤워를 하는 중에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서도 할 수 있다. 하얀 백지 위에 오래된 연필로 손글씨를 쓰는 일도 명상이 될 수 있다.


골방에 앉아 생쌀만 먹으며 백일기도 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을 눕지 않고 앉아 살다 죽을 때도 앉은 채 죽는 일도 아니다.


명상의 궁극 목표는 ‘모든 생각들이 끊어진 자리를 찾는 일’인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방법들을 권한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라 하고, 기도하라 하고, 운동하고 요가하라고 한다. 모두 산 정상으로 가는 방법들이고 방편이다.





큰 산이 있다. 정상에 갔다 온 사람들이 “그곳에 가면 무지개가 걸린 하늘도 보고, 넓고 푸른 바다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꽃들과 향기로 가득한 꽃밭도 펼쳐져 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정상에 한번 가봐야지 다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산에 갈 생각이 없는 사람도 있다. 입구까지 가 쳐다만 보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중간까지 가다 계곡에 발 담그고 놀다 오는 사람도 있다. 정상에 올라 깃발을 꽂고 왔는데 거기가 정상인지 헷갈리는 사람도 있다. 그곳이 아니라 하여 다시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정상을 찍겠다는 의지가 있어 죽기 살기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다리가 아프고 힘들면 입구에서 쳐다만 봐도 좋다. 오르다 지겨우면 계곡가에 신발 벗고 발 담가 놀 수도 있다. 중턱 바위에 앉아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쉬다 올 수도 있다.

     

명상하겠다 하여 이곳저곳 찾아다니고 물어보면 다들 산 정상을 찍으라 한다. 깨달은 이들은 죽기 살기로 올라가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럴 수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참 좋은 일인 데 따라 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정상에 올라갈 의지가 빈약했다. 실력도 안 됐다. 정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도 싶었지만 산 입구 계곡물에 발 담그고 막걸리 마시며 노는 것이 더 좋았다. 산 중턱 나무 그늘에 앉아 산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몸 컨디션이 좋아지고 다리에 힘이 생겨 꼭대기까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잠깐 들렀다 오는 숲과 계곡만으로 행복하다. 새소리 바람소리 숲향기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고 마음에 안정을 찾는다.


그게 내가 찾은 명상법이고 명상습관이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 편하자고 하는 일이다. 명상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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