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의 복귀전
아직은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발목으로
동네 뒷산에서 오전 셀프 쉐이크아웃런을 하고
두 시간 운전 후 숙소에 도착한 대회 전날 밤.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잠시 뒤,
천둥소리에 눈을 떴다.
“쿠어어엉! 드르르…”
비 예보… 없었는데?
생각보다 소리는 가까이서 들렸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귀마개를 뚫고 들어온 엄마의 코골이 소리.
아, 이거 큰일 났다.
조용히 일어나서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음악을 틀고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시간이 흘러 어느새 기상 시간.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그래도 두어 시간은 잤나 보다.
알고 보니 엄마가 새벽에 깨서
내가 잠 못 드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안 주무시고 계셨다고 한다.
음, 다음 대회에선 꼭 방은 각각 쓰는 걸로.
그래도 이 기회에 좋은 교훈을 얻었다.
푹 자지 못해 컨디션이 100% 충전되지는 못했지만
체력을 여태 길러왔던 게 나름 도움이 된 듯했다.
커피 한잔하고 나니 몸이 좀 깨는 느낌이다.
발목도 아주 살짝 붓기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어제보다는 괜찮았다.
대회 아침 루틴이 된 진라면 순한맛을 끓여 먹고,
채비를 해서 대회장으로 향했다.
대회장에 도착하니 오전 9시 40분경으로,
우리 앞 타임인 14km 팀써밋 챌린지 출발 준비가 한창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엄마와 팀으로 참여하여
다양한 미션 수행도 하고 재밌게 올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지금은 내 발목 상태로
안전하게 8km를 완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기념품과 배번표를 받아 들고,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 전에
사전에 신청해 둔 스포츠 테이핑 부스에 방문했다.
테이핑해 주시는 분께
미세골절로 반깁스 푼 지 일주일 됐다고 얘기하니
미소를 지으시면서도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로
‘네???!’ 하고 되물으셨다.
하긴, 정형외과 선생님에겐 꽤나 충격적일지도...
그러고는 여태까지 내가 본 테이핑 중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테이핑을 해주셨다.
테이핑이 워낙 단단해서 발목 보호대를 또 하면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 같았다.
그리고 트레킹 폴도 아직 익숙하지 않아
결국 맨몸으로 가기로 했다.
내 튼튼한 두 다리와 탄탄한 테이핑을 믿어보자.
차로 잠시 돌아온 엄마와 나는
강렬한 레드 컬러의 클럽데이 기념 티셔츠로 갈아입고
배번표를 착용하고 다시 대회장으로 나섰다.
기념사진을 몇 장 남기고 간단히 몸을 풀고 나니
이제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스타트 라인으로 가서 섰다.
부상 이후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순간의 방심으로 인한 미세 골절과 부분 인대파열.
부상은 찰나이지만 회복은 길었다.
지금 뛸 수 있는 건,
10년간 꾸준히 이어온 근력 운동 덕분일 것이다.
한순간에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스스로 뿌듯하기도 했다.
그보다 아예 안 다치면 더 좋았겠지만…
드디어 출발!
어릴 때부터 엄마와 스키장을 자주 다녔지만
하얀 눈 대신 파릇파릇한 잔디가 깔린 슬로프를,
그것도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이란 꽤 신기했다.
첫 오르막을 지나며 발목의 느낌을 살폈다.
테이핑이 단단하게 잡아주는 게 느껴진다.
다행히 통증은 없다.
아직은 뜨거운 11시의 태양에 슬슬 지쳐갈 때쯤
스키장 구역이 끝나고 검봉산 자락에 들어섰다.
그래 이거지.
트레일 러닝을 사랑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나무 그늘이다.
지쳐가던 엄마와 나는 산길에 들어서자
다시 금방 기운을 차렸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산소와 피톤치드도
우리의 천연 에너지 공급원이었을 것이다.
오래간만에 오르는 산이라서 그런지
오르막이 꽤 힘들긴 했지만,
흙길에 잔잔히 깔린 낙엽과 귀여운 도토리,
그리고 가끔 고개를 들면 보이는
잔잔히 구름 깔린 가을 하늘까지...
모든 게 너무 완벽했다.
가을 산행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빵트레일런과는 다르게 중간 간식이 없어
서운해할 엄마를 위해 챙겨간
미니 약과, 망고, 소시지 등을
두세 번 정도 쉬어가며
야금야금 꺼내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지난번 대회에서
가방을 통째로 딸에게 맡기게 되어,
이번엔 아예 가방을 안 매고
맨 몸으로 산에 오른 엄마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 온 게 다행이었다.
혼자 온다면 느끼지 못할 재미,
그리고 친구와 오는 것과는
또 다른 감동이 함께 하는 모녀의 산행이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정상.
여기서도 간단히 인증샷을 찍고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하산길엔 급한 내리막 구간이 생각보다 많았다.
순간 긴장했지만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디뎠다.
밧줄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 구간에서는
엄마를 따라 장갑을 끼고 뒤로 걷기도 했다.
괜찮다.
이렇게 차분히 가면 끝까지 할 수 있다.
전날 내린 비로 미끄러운 구간도 있고,
비 때문에 나무 계단이 부서진 곳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리막길에서
신나게 페이스를 올리는 우리 모녀도
차분히 끝까지 걸어 내려오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2시간 50분 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발목은 괜찮았다.
테이핑 덕분인지, 산 길의 부드러움 덕분인지.
아니면 엄마와 함께여서 그랬는지.
완주 메달을 받아 목에 거는 순간,
한 달 전 넘어지며 '이번 시즌은 끝났구나' 생각했던
그날이 떠올랐다.
스스로에게 가졌던 의문과
올해는 뛰기를 포기하려고 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다시 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알았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것이라는 걸.
그렇게 다시 일어서면,
천천히 걸을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또다시 뛸 수 있게 된다는 걸.
산은 오늘도 이렇게 나에게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