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회사를 그만둬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제주에서 처음으로 연세 150만 원에 이층 주택을 얻었다. 당시 제주에 살던 지인이 육지로 올라가게 되면서 집을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백수였던 상황에서 이런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이런 집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덜컥 연세를 보냈다. 제주에서는 일 년 치 월세를 한 번에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한 달 만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제주 집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휴양지의 전원주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원도 마당도 없고, 4차선 대로변에 위치한 작은 창고 같은 집이었다. 일층은 텅 빈 주방과 공방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이, 이층은 작은 방 하나가 전부였다. 게다가 도착하자마자 잊고 있던 문제가 떠올랐다. 보일러가 고장 나 있었다. 차가운 방바닥 위에 매트리스도 없이 얇은 이불 하나만 깔고 첫날밤을 보냈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이 밝아온 텅 빈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냉기가 감도는 방 안에서 입술 끝으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 어떡하지?"
그때는 몰랐다. 이런 집에서 살면 몸과 마음이 얼마나 고단해질지.
창문으로 바다가 보였지만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진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강풍과 난방이 되지 않아 생긴 발가락의 동창, 덤프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집 전체가 덜덜 떨리는 진동은 상상했던 제주 라이프와는 거리가 멀었다.
창문 아래 자리 잡은 무덤도 처음엔 충격적으로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졌다. 사람은 모두 언젠가 가야 할 곳이 있고 살아가는 동안 그 자리를 지나칠 뿐이라는 깨달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집은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어야 하지만 그 집은 그런 안온함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집 안보다 밖이 더 따뜻해서 아침에 해가 뜨면 추운 집을 벗어나 귀덕리에서 곽지를 지나 한담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그해 세 달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지냈는데 냉기가 가득한 집을 떠나 온기를 찾아 떠도는 여행이었다. 집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제주 반대편에 살고 있는 친구가 오랜만에 만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서 혼자 이러지 말고 함덕으로 와라."
친구의 말을 듣고 곧바로 따라나섰다.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아침에 핸드폰으로 오일장에 들어가 집을 검색했다. 마침 함덕 해수욕장 근처에 방 3개짜리 집이 매물로 나와 있었다. 대충 씻고 서둘러 집을 보러 갔다. 주황색 지붕의 작은 농가주택이었고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썼다. 그렇게 새로운 함덕라이프가 시작되었다.
이 집은 전형적인 제주식 밖거리 집이었고 옆집, 앞집 모두 공방을 운영하던 이웃들이라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어 작은 공동체처럼 서로의 일상을 나누었다.
집 앞 텃밭에는 꽃을 심고 토마토를 키웠다. 아침이면 슬리퍼를 신고 해변으로 나가 바다수영을 즐겼고, 집으로 돌아와 씻은 뒤 앞집 공방 카페에서 라테를 테이크아웃해 소품 작업을 했다. 바다와 공방, 텃밭, 그리고 이웃들이 만들어준 온기는 시골 생활을 견디는 힘이 되었다. 좋은 이웃은 비싸고 좋은 집보다 더 큰 자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비싸고 좋은 집에 좋은 이웃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함께했던 시간들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집에도 문제가 있었다. 화장실이 집 밖에 있어서 비가 오는 날이나 추운 날에는 힘들었고 샤워실은 그냥 구멍이 뻥뻥 뚫린 돌창고라 겨울에는 근처 목욕탕 쿠폰을 끊어 다녀야 했다. 안 거리에는 집주인 삼춘(할머니)이 살고 있었는데 사생활 침범이 종종 있었다. 자고 있을 때 환기를 시키라며 갑자기 안방 창문을 벌컥 열거나, 외출한 사이 출입문을 활짝 열어두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 뒤로 문을 잠그고 다녔더니 본인을 도둑취급하냐며 역정을 냈다.
제주는 태풍이 오면 정전이 잦았는데 한 번은 태풍 예보가 있던 날 보조배터리를 충전하고 새벽까지 실시간 뉴스를 듣고 있었다. 기록에 남을 강한 태풍으로 빗물이 집 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창틀을 수건으로 막으면서 유리가 깨질 것을 대비해 짐을 싸두었다. 그날 밤 뜬눈으로 지새우며 태풍이 지나간 다음, 대문을 열고 나가 보니 골목의 유리 창문들이 모두 깨져 있었다. 집이 주는 불안과 환경의 열악함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집은 그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제주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함덕 끝의 신축집은 안정감을 선사했다. 튼튼한 구조와 뛰어난 단열 덕분에 태풍이 불어도 바람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삶은 안락함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지인들도 자주 놀러 오고, 바닷가 산책길에서는 아는 얼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저녁이면 친구와 운동장에서 만나 몇 바퀴를 돌며 수다를 떨고 바로 옆에는 아는 언니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어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공방도 잘 운영되었고 그 시절은 귀촌 생활 중 가장 리즈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매년 내야 하는 700만 원의 연세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몇 년 동안 그 돈을 모으면 육지 시골에 작은 농가주택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연세를 내며 살아야 할지 아니면 육지에 집을 마련하고 정착할지를 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가까이 지내던 친구도 육지로 떠나고 헛헛한 마음과 함께 제주는 이미 집값이 말도 안 되게 오를 데로 올라 공방 수입으로는 이번생에 제주에서 집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닌데 언제까지 연세집을 떠돌며 살 수는 없었다.
제주에서 처음에는 아름다운 바다와 고요한 환경에서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낡은 시골집에서 느끼는 고독과 불안은 생각보다 더 컸고 안식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육지로 집을 찾아 다시 떠나 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