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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02. 2024

[소설] 01화 이상한 편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며 돌아오는 일이 있다. 저녁마다 깨끗이 정리하고 퇴근해도 출근하면 수북이 쌓인 컵과 티스푼처럼. 창문부터 열어 환기를 시키고 책상마다 놓인 컵과 탕비실에 널브러진 용기를 모두 수거하여 설거지한다. 부지런히 놀린 손에 묻은 물기를 털은 후 팀원들의 책상을 닦고 화분에 물을 준다.


디자이너로 들어와 잡무가 더 많은 일상이지만 불평 한번 한 적 없다. 오히려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그녀에겐 평온한 일상이다. 아무리 고된 날들이 이어져도 고요한 일상을 유지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반대로 도돌이표처럼 돌아와 그녀의 일상을 흔드는 것들이 있다. 오늘 아침 그녀의 집 우편함에 꽂힌 편지처럼. 편지에는 보내는 사람 이름도, 주소도 쓰여 있지 않았다. 우체국 소인이 없는 편지. 누군가 직접 구여주가 사는 집 우편함에 넣었다는 뜻이었다. 불길한 짐작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녀는 봉투를 뜯길 망설였다.


불행은 때가 되면 다양한 형태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새출발을 꿈꾼 대학 새내기 때도, 아르바이트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는 중에도, 첫 직장에서도 그녀는 자꾸만 불행에 쫓겨났다. 마치 일거수일투족 지켜보는 것처럼 삶의 중요한 시점에 불행은 언제나 그녀의 꼬리표를 물고 늘어졌다.


꺼림칙함에 그녀는 편지를 뜯지도 않고 쓰레기 더미 속으로 던졌다. 받는 사람 이름도 없는 편지의 주인이 꼭 자신이란 법은 없다며 외면했다.


받는 사람 구여주.


그녀의 속내를 단숨에 알아챈 듯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던 편지에는 수신인이 추가되었다. 그녀의 이름 석 자가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경고처럼 읽혔다.


이번에는 또 어떤 대가를 바라는 편지일까. 그녀는 이미 수많은 일상을 스스로 내다 버린 뒤였다. 그런데도 편지가 온다는 건 그녀가 겨우 이어가던 숨죽인 하루조차 빼앗으려는 걸까.


여주는 다소 거친 손길로 봉투를 뜯었다. 깨끗한 봉투와 달리 안에 들어있는 편지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질 만큼 누렇게 바랜 종이였다.


접힌 편지를 펼치자 글씨는 더 엉망이었다. 휘갈겨 썼거나 처음 글씨를 배운 사람처럼 삐뚤빼뚤한 모양새였다. 편지보다는 낙서에 가까웠다. 여주는 미간을 좁힌 채 읽기 힘든 글자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여주야.

넌 나를 원망했어. 그 얼굴이 잊히지 않아.

널 그냥 보낸 걸 후회해.

네가 미워. 미워. 밉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단 몇 줄이 전부인 이상한 편지. 예상한 내용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의미일지 가늠하는 사이 봉투에서 툭, 작은 명함이 떨어졌다. 명함을 집어 자세히 들여다봤다. 카페 이름이 적힌 명함에는 펜으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카페 흐노니. 회화로 오세요.’


회화.


두 글자에 그녀의 가슴이 철렁인다. 12년 전 도망치듯 떠난 곳이자 다시는 찾지 않은 곳. 명함을 든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누가 이런 편지를 보낸 걸까. 여주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건 아닐까 싶어서.


불결한 것이 몸에 묻은 것처럼 편지와 명함을 쓰레기 더미 속으로 던졌다. 갑자기 회화로 오라니. 겨우 유지하고 있는 숨죽인 하루하루조차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는 온갖 빛깔로 빛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아침 라디오에서는 이른 캐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여주의 귀엔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두꺼운 외투와 머플러로 몸을 칭칭 감은 채 핏기 없는 얼굴로 버스가 회사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회사에 도착하면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몸이 녹기도 전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탕비실을 정리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박자를 맞추듯 움직이던 그녀의 몸이 비틀거린다. 이미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편지 한 통에 불안이 그녀를 흔들고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에 움트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오는 팀장이요, 본부장님이 미국에서 직접 스카우트한 디자이너래요.”


“혹시 새로 오는 팀장 때문에 지금 팀장님 밀려나신 거 아니에요?”


“쉿, 지금 말들이 많아.”


낮게 수군거리는 말은 오히려 귀에 더 잘 들리는 법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겨우 아침 잡무를 마치며 진정시킨 여주의 마음이 다시 불안으로 퍼졌다. 무언가 변한다는 건 그녀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여주 씨 인사 평가도 좋고, 내가 말 잘해뒀으니 걱정하지 마. 정규직 전환 꼭 될 거야.’


지금 팀장은 유일하게 여주를 제대로 봐준 사람이었다. 직원들과 잘 어울리진 못했지만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남들이 꺼리는 일들도 찾아서 하는 그녀에게 요즘 보기 드문 직원이라며 칭찬했다.


그 낯선 칭찬과 격려에 얕은 기대를 품었다. 정규직 전환이 되면 더는 불안정하게 떠돌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며, 요양병원비를 내느라 항상 허덕이는 주머니 사정이 조금은 나아질지 모른다며. 하지만 그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또다시 불안이 성큼 다가왔다. 아무리 팀장이 괜찮을 거라 했지만 떠나는 이의 말처럼 불확실한 것도 없으니.


“참나, 디자인팀 개편한다는 게 있는 사람 내쫓는 거야? 이러니 회사가 발전이 없지.”


최 과장은 누가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불만을 터뜨렸다.


“최 과장님 심기가 불편해 보여요.”

“팀장 승진 기대하고 있잖아요.”


연초 디자인팀은 1팀, 2팀으로 개편될 예정으로 팀장 승진을 기대 중인 최 과장에게 해외파 영입이 반가울 리 없었다. 지금 팀장의 안위를 걱정하기보단 만만한 상대가 없어진다는 아쉬움과 라이벌 등장이 못마땅하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영 별로네. 맥주 한잔 어때?”


퇴근 시간이 되자 시계를 흘끔거리던 최 과장이 굳은 어깨를 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약속이 있어서요.”


“과장님, 금주하신다면서요?”


직원들이 슬쩍 눈치를 보며 거절할 핑곗거리를 찾았다.


“팀장님 퇴사하시는데 금주가 문제야? 안 그렇습니까?”


최 과장의 고개가 팀장 쪽을 향했다. 매일 이런저런 이유를 들먹이며 술자리를 만드는 최 과장이니 팀장 퇴사는 얼마나 좋은 명목인지.


“난 괜찮아요. 송별회 때 제대로 한잔합시다.”


정작 그 주인공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니 최 과장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팀장의 말에 사람들은 잽싸게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여주 씨는 어때?”


포기를 모르는 남자 최 과장은 타깃을 여주로 바꿨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곤 여주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별일이 없으면 항상 제일 늦게 남아 뒷정리를 하고 퇴근했지만 오늘은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구여주!”


건물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최 과장이 따라나섰다.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빼지 마. 밥 먹고 갈까?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잖아.”


최범석 과장. 그가 이러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여주가 입사했을 때부터 툭하면 밥 먹자, 술 먹자 하는 말들을 해왔다. 어쩔 수 없이 직원들과 같이 끌려간 적도 있지만 최 과장이 여자 사원에게만 수작을 부린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칼같이 거절했다.


“저 정말 몸이 안 좋아서요.”


“여주 씨 계약 얼마 남지 않았잖아. 정규직 안 하고 싶어?”


“무슨 말씀이세요?”


끈질기지만 몇 번 거절하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더 권하지 않던 최 과장이 오늘따라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버텼다.


“디자인 팀 두 개로 나뉘면 어차피 팀장 자리 하나는 내가 갈 테고, 팀장한테 팀원 꾸리는 권한 정도는 있잖아.”


여주는 쓰게 웃었다. 그 웃음을 호의로 느낀 최 과장이 느물거리게 마주 웃었다.


“팀장 되시면 그때 밥 사주세요.”


뒤에서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를 등진 채 여주는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 아무리 사정이 녹록지 않다지만 믿을 사람, 믿지 못할 사람 구분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여주는 걷다가 잠시 멈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치는 하루. 아침부터 온통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하루. 모든 건 그 꺼림칙한 편지가 시작이었다.


원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아침에 편지를 버린 쓰레기 더미를 흘긋 쳐다봤다. 쓰레기는 수거한 뒤였고, 편지 역시 쓰레기와 함께 깨끗이 치워져 있어야 했다.


‘또 왔어.’


분명히 버렸는데. 그녀의 집 우편함에 편지가 돌아와 있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CCTV 하나 없는 오래된 빌라의 옥탑방. 보안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건물 밖을 살폈지만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신고라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이 편지를 들고 경찰서에 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그동안 그녀의 경험에서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대체 누구야.’


불길한 편지를 남긴 사람이 누굴까. 누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걸까. 명함 속 카페 흐노니는 대체 어떤 곳일까. 온통 알 수 없는 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다시 버리자.


만약,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이 편지는 또 돌아올지도 모른다. 여주는 아침에 버렸던 그 자리에 다시 편지를 버렸다.


집으로 올라가서는 방 불을 끈 채 창가에 앉아 편지를 버린 곳을 내려다봤다. 그 누군가를 잡기 위해 밤새도록 계속 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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