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페이스 조절이 무언지도 모르고 동네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두어 번쯤 뛰고 겁 없이 나갔는데, 생각보다 기록이 잘 나와버리는 바람에(달리기 초초초보의 기준이다) 그 성취감에 도취되어마라톤이라는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이후 코로나가 전 세계를 얼려버렸고 한동안 공식적인 대회는 나갈 수 없었다.
대회들이 간간히 열리기는 했지만 마스크 규정 등 제약사항이 많아 맘 편히 달리기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비로소 2023년이 되어서야 우리나라 3대 마라톤대회 중 하나라는 동아마라톤을 다시 신청할 수 있었다.
땀을 뚝뚝 흘리며 헬스장 러닝머신을 열심히 달리며 준비한 결과 58분대의 기록으로 10km 마라톤을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매사에 성과지향형인 나는 운동에서조차 성과에 목마른 사람이었다.마라톤을 마친 후 도장 깨기 하듯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한라산 백록담까지 무사히 오르고 왔다.
그럼 다음은?
'스카이런'이라는 대회가 있단다.
그냥 달리기가 아니라 무려 123층의 롯데타워 계단을 뛰어오르는 대회라고 한다.
이 대회 역시 코로나로 중단된 이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대회라 신청하는 것부터 열기가 어마했다.
5분 만에 마감된다는 글을 읽고 손을 벌벌 떨며 신청했다.
다행히 성공!
그런데 너무 급히 신청한 나머지
경쟁 분야와 비경쟁 분야로 나누어진 대회에서
실수로 경쟁 분야를 신청해버리고 말았다.
'경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압박감..
'이번엔 즐기자' 하고 비경쟁으로 신청하려고 했는데 그만 실수를 했다. 혹시나 수정하면 신청이 취소될까 싶어 확인해 보니 대회 시작 시간과 기록 측정 정도만 다르다고 해서 그대로 두었다. 같이 신청한 후배에게 말했더니 아마 나의 본능이 그렇게 시켰을 거라고 한다.
무어라 한 마디 반박하지 못했다.
'이 자식, 나를 간파하고 있군.'
보통 30분대에 많이들 뛰었다고 하는 글들을 보고 나니,
나는 왠지 20분대에 뛸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 안에서 용솟음쳤다.
10km 도 1시간 내에 완주한 나야!
그때부터 약 2주간 헬스장에서 천국의 계단으로 불리는 스텝밀을 오르며 대회 준비를 해나갔다.
아. 천국의 계단...
계속 타면 천국 가는 계단이구나..... 러닝머신은 아주 젠틀한 운동기구였다, 천국의 계단에 비하면.속도 레벨을 5로 하고 30분을 타라는 친구의 조언에 한 계단, 두 계단 타다가..
정지버튼을 눌렀다. 2분 만에. 헬스장에서 인기 있는 새 기구가 들어왔다고 홍보한 머신이 바로 이건데, 이게 대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거지?
꾸준한 속도로 타의에 의해 계단을 오르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운동인 줄 몰랐다.
자괴감이 들었다.
계단을 2분밖에 오르지 못했는데 2197 계단을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도저히 혼자서는 못할 것 같아 계단을 오른 사진을 공부친구들이 모인 카톡방에 올려 응원을 받으며 근근이 운동을 이어나갔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대회 날이 왔다.
"1052번 참가자님, 대회를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일반 마라톤대회와는 달리 스카이런은 스타트 라인에서 한 명씩 한 명씩 출발을 한다.
곱게 단장한 행사 진행자들이 마이크를 건넨다. "한라산 백록담의 정기를 받아 준비했습니다!"
대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우렁찬 함성소리!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탕! 출발!
스카이런은 계단부터 기록 측정이 시작되었는데,
'계단은 뛰고 도는 곳에서는 걸어라' 하는 마라톤 선배님의 조언을 기억하며 한 계단 한 계단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8층쯤부터 무언가 이상하다.
너무 숨이 차서 도저히 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8층인데? 난 123층까지 올라가야 되는데? 아.. 뛰면 안 되는 거였구나.....
천국의 계단을 그렇게 타 놓고도 아무 생각 없이 뛰어올랐구나 내가....
그때부턴 빨리 올라야 한다는 기록 욕심을 내려놓고 걸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스카이런은 일반 마라톤 대회처럼 옆에서 누가 같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와의 싸움을 하며 혼자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점에서 여느 마라톤 대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중간중간 있는 모든 음수대를 다 거쳐 꾸역꾸역 물을 마시며 올라갔다.
마라톤 용어 중 '러너스 하이'라는 것이 있다.
30분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경쾌한 느낌이 드는데, 이 행복감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오르고 올라 119층 정도 올라가니 드디어 곧 끝이 난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입꼬리가 올라가며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나에게 러너스 하이가 온 순간인가 싶었다.(아쉽게도 몸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때 앞에서 너무 힘들어하며 올라가던 어떤 여자 선수를 만났다. 대충 봐도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던 그 여자분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계단 손잡이를 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휙!'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할 수 있어요, 다 왔어!!!" 하며 그 여자분의 손목을 잡아끌고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같이 올라갔다.
모르는 여자분의 손을 이렇게 잡아도 되나?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너무 힘든 상태였고, 조금만 올라가면 이 시간이 끝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래도 돼요?" 그 여자분이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아. 경쟁부문.
하지만 손목을 놓지 않았다.
상위권에 들 기록이 아닌 것을 8층쯤 올랐을 때부터 알았으므로 그 여자분에게 민폐가 아닐 것임을 알아서이기도 했고, 그보다 너무 힘든 이 순간 타인이지만 함께 헤쳐나가고 싶은 마음에서 이기도 했다.
며칠 후 대회 당일의 사진을 게시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전문가가 찍어준 사진이 제법 그럴싸하다.
그날의 고통은 온데간데없고, 여기저기 사진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잘 나왔네' 하고 사진을 넘겨보던 중 피식 웃음이 났다.
119층에서 만났던 그 여자 선수의 손목을 낚아채 같이 마지막 몇 계단을 오르던 그 순간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앞서서 올라가느라 몰랐는데, 지금 사진으로 보니 그 여자분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라 있다.
당시의 내 갑작스러운 행동을 호의로 받아주었었나 보다 싶어 다시금 마음이 놓인다.
10km 마라톤의 좋은 기록, 한라산 백록담도 8시간 만에 주파한 덕분에 '운동에 소질이 있나 보군'했던 내 자만심을 롯데타워가 사뿐히 즈려밟아주었다.
몇 번의 도전과 성공, 그리고 좌절을 맛보고 나니 이 경험들이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