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부담과 욕심 사이

2025 서울신문 하프마라톤

by 심바
이 대회 취소할까...


5월 17일, 하프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요즘 마라톤 대회는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약 1년 전에 신청을 받는다.

신청을 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마 '상반기 마지막으로 하프를 멋지게 달려내 보자!' 였던 것 같다.

작년에는 10km를 뛰었던 대회, 올해는 하프를 뛰는구나.


갑자기 아빠의 수술이 잡혔다.

70% 이상의 확률로 폐암일 가능성이 높으며, 수술로 조직검사를 해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 대회는 취소해야겠구나 생각했다.

수술일이 5.15일이니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가야겠거니 하며..






그렇지만 사실 마음 한편엔 어느샌가 자라 버린 부담감이

대회를 취소하고 싶은 마음을 더 키웠다.

달리기 인생 처음으로 4월 16일부터 매주 수요일마다 수강했던 러닝클래스는 5월 14일이 마지막 수업이었고,

17일에 있는 대회는 그간 수업의 효과를 증명하는 화려한 피날레가 되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https://brunch.co.kr/@simba/33


너무 잘 달리고 싶다!

이렇게 배웠는데 기록이 잘 안 나오면 어떡하지?



두 가지 생각이 내 다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제까지 제법 여러 번의 대회를 출전해 왔지만, 처음으로 '나가기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빠의 수술일에는 엄마와 근처에 살고 있는 동생이 가기로 얘기가 끝났고, 일요일에 남편과 함께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그 말인즉슨, 토요일에 있는 대회는 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

게다가 나의 하프 목표기록인 1시간 50분 언더를 도와주신다는 페이서까지 등장. 같은 크루에서 종종 달리던 분께서 페이스메이커를 해주실 수 있다고 했다.

이제 퇴로는 없다, 달려내야만 한다.



대회 당일 아침, 같은 크루에서 나를 포함하여 5명이 이 대회에 출전했다.

같이 간단히 몸을 풀고 날씨 얘기를 나눴다.

전날인 16일에 내린 비가 어마했기 때문.

스콜처럼 퍼붓던 비가 오늘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지만,

올라버린 기온과 50%가 넘는 습도는 대회 시작도 전에 땀이 뚝뚝 떨어지게 만들었다.

오전 8시 30분, 대회는 여지없이 시작되었다.






1시간 58분 30초.

이제까지 참가한 4번의 하프마라톤 중 기록이 가장 안 좋았다. 5km 이후 가양대교의 은은한 업힐을 지나면서 이미 체력을 소진해 버렸고, 웜업구간 이후 페이스를 올리기는커녕 모든 급수대를 다 들러 이온음료와 물로 배를 몽땅 채워버렸다. (마시는 걸로도 모자라 온몸에 들이부어주던 페이서 덕분에 들큰한 땀냄새가 진동을..)

갈증이 느껴지면 이미 끝이라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주로 곳곳마다 서있던 앰뷸런스.

10km 이후부터는 저 앰뷸런스 탈까? 걸어버릴까? 하는 두 가지 생각만이 내 신경을 지배했다.

힘들 땐 그 생각에 몰두하기보다, 나의 바깥에서 나의 상태를 관찰해 보라는 조언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힘들 뿐.

들쑥날쑥 인 페이스, 턱까지 차오르는 숨, 습하고 뜨거운 햇빛.

이 모든 것들이 내 다리에 척하고 붙어 달리기가 힘들었다.

이런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6분대 페이스로 순식간에 떨어졌다.


이렇게 뛰면 2시간 넘어!!


그럼에도 달렸다.

너무 포기하고 싶었지만 달려낸 이유는 바로 미안함.

내 앞에서 내 느린 페이스에 맞춰 나를 끌어주고 있는 페이스메이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페이서는 막바지 반쯤 포기한 듯 뛰는 나에게 2시간은 넘기면 안 된다 크게 소리를 질러주었다.

나의 목표, 의지, 그동안의 연습 이런 거창한 것보다도

그 순간엔 그저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내 달림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지막 구간, 마치 트레일런과도 같은 작고 잔인한 업힐을 겨우 올라가 피니시 라인으로 달려갔다.

21.0975km의 잔인한 하프가 끝났다.






기록은 1시간 58분 30초.

나의 첫 하프보다도 1분여 더 느린 기록.

누구에겐 이것도 빠른 거라고 하겠지만, 나에겐 뼈아픈 기록이다. 나는 아직도 달린 결과에만 연연하는 진짜 초보러너인 것 같다.


오래오래 달리고 싶은데.

아이들이랑도 같이 대회에도 나가고 싶은데.

백발이 무성해도 꾸준히 달리고 싶은데.

이렇게 욕심만 자꾸 앞서면 안 될 것 같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이젠 좀 내려놓고,

달리기를 처음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가보자.

늘 발전하지 않아도, 대회에서 달리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다시 재미있게 달릴 수 있도록

힘내, 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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