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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선희 Jul 17. 2024

달팽이야, 팽기지 마.

비가 한바탕 내리고 잦아든 저녁, 외출을 마치고 집에 가던 중 집 앞 보도블럭에서 꿈틀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달팽이였다. 더듬이를 쭉 뻗고 여기저기 방향을 재가며, 어디론가 바쁘게 뛰어가고, 아니 걸어가고, 아니 미끄러지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달팽이를 지켜봤다. 원래 이런 거 자세히 보는 거 좋아하지 않았는데, 함께 걷고 있던 사람의 발걸음이 무척 빨라 숨이 차던 상황에서, 달팽이를 핑계 삼아 잠시 속도를 늦추었던 것이다. 달팽이는, 아무래도 보도블럭 끝쪽에 있는 우거진 수풀 속으로 가려는 것 같았는데, 지금 그 속도로 가다가는 중간에 사람들의 발자국에, 자전거 바퀴에, 밟힐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미끄덩거리는 몸을 잡을 용기는 없었고, 등껍질을 살짝 집어 올려 잎사귀 언저리에 놓아주고 왔다.


정말 다행이야, 누가 밟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 라고 생각하던 찰나, 문득 저 달팽이의 최종 목적지는 잎사귀 언저리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가수 패닉이 말했듯이, 저 달팽이는 바다를 건너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바다로 가고 싶을까, 가장 가까운 바다가 어디지? 을왕리 정도가 되려나, 여기서 을왕리까지 저 달팽이가 잘 도착하려면, 우선 누군가의 축축한 신발이나 가방, 혹은 우산에 붙어 이동해야 할 것이다. 그의 출근길에 동행하게 된다면 달팽이는 운 좋게 지하철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용산역 정도까지 가고 나서, 열차와 열차들 사이에서 몸을 던져 (그게 더 빠를 테니) 바닷가로 가는 열차를 타면 바다에 닿을 수 있을 테지.


그때까지 적절한 수분을 머금어 피부가 마르지 않아야 하고, 누군가 발견한 후 “꺅” 소리를 내며 달팽이를 바닥으로 떼어내지만 않는다면, 달팽이가 바다를 향해 가는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달팽이 본인이 힘을 내어 주는 것이다. 지치지 말고, 힘 빠지지 말고, 가고자 하는 열정을 지닌다면 달팽이는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에는 ‘팽기다’라는 말이 있다. ‘힘이 다하다.’라는 뜻이다. 을왕리까지 젖 먹던 힘을 내어 가며 가는 달팽이의 여정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런데 달팽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바다였을까. 언젠가 들었던 노래에서 ‘바다’ 얘기를 들고, ‘나도 한번 가보지 뭐’ 하고 출발은 했는데, 중간에 힘이 다하여 팽기게 되었고, 그렇게 달팽이는 동네 개천 어딘가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게 또 나름 괜찮아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바다는 무슨, 짠 건 몸에도 안 좋아’ 하면서.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 더 큰 세상을 만나야 한다는 말은 도대체 누가 한 말일까. 왜 우리는 현재의 삶의 공간에서 더 큰 곳으로 가려 노력하는 걸까. 더 큰 곳은 더 큰 수고로움을 낳을 텐데 말이다. 지금 있는 곳도 불안하고 버거운 건 마찬가지인데, 난 애쓰고 있는데, 늘 마음속엔 더 큰 곳으로 가야 승리자가 될 것 같다. 큰 단체에 속해 있으면 내가 커지는 느낌이 들어서 더 큰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일까. 어쩌면 큰 단체 속에서 우리는 남은 힘을 다 소진하고 팽기다 못해 나중엔 팽 당할지도 모르는데도 말이다. ‘그냥 지금이 딱 좋다’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야망이 없다 꿈이 없다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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