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인 이유
작년 12월 무렵, 그러니까 막연히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그땐 모든 것이 막연했다.
무엇을 그릴지, 어떤 그림을 그릴지, 어떤 도구를 사용할지 전부 막연했다.
별다른 경험도 없이 호기롭게 시작했으니 시행착오는 마땅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연필로, 어떤 날은 잉크로, 어떤 날은 수채화 물감으로, 또 색연필로 그렸다.
그러다 마음이 바뀌면 아크릴 물감도 사용해보고 목탄이나 크레용도 사용했다.
늦은 나이에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시작했기에 마음만 급했지 도무지 체계란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서너 달쯤 지났을까? 쌓여가는 그림들과 재료들이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작업 공간이라고 해 봐야 가족이 함께 거주하는 아파트의 거실 한켠, 그나마도 가족과 공유하는 공간이다보니
그림 그리는 재료들을 마냥 널부러 놓을 수만은 없었다. 채 마르지 않은 그림과 각종 도구들을 수시로 치워야 하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쌓여가는 그림들도 골치였다. 종이에 그린 그림은 파일에 정리라도 할 수 있지만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여기저기 구석에 낑겨질 처지였고 그나마도 공간이 없었다.
또 한 가지 걱정거리는 만만치 않은 재료비였다.
그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이패드로 그려 봐?'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남편도 아들도 오래된 것이라 사용하지 않는 방치된 아이패드. '그래, 이 걸로 그려보자. 이모티콘도 이걸로 만들었잖아."
아이패드로 그리는 그림도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더 고민하면 꽤 괜찮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 같았다.
문제는 몸이 아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루 4~5시간 그림을 그리다 보니 목과 어깨 그리고 손목의 통증이 심해졌다. 패드를 내려다 보고 그리는 자세가 문제였다. 이것저것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될만한 것은 다 시도해봤다. 스트레칭, 온찜질, 파스 등등...그닥 효과는 없었다.
게다가 나의 고질적인 안구건조증이 너무 심해졌다. 흡사 모래밭에 눈알을 굴리는 것 같은 통증은 아픈 어깨와 더불어 매일매일 큰 고통이고 불편이었다. 인공눈물을 들이부어도 개선되지 않았다. '안 되려나? 그림 그리는 거 그만두어야 할까?' 방법을 찾아야 했다. '방법? 있다 있어.' 우리 집엔 오래된 맥북도 있다. 배터리 수명이 다해서 1시간마다 충전해 줘야 하고 소음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대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코로나19 때문에 재택근무를 한 덕분에 남편이 사용하던 와콤 태블릿도 있다. 저가형이라 작고 어설펐지만 이걸로 다시 시작해보자.
오래되고 낡은 기기들이라 불편함은 있었지만 몸의 불편한은 훨씬 덜했다. 눈의 피로도 아이패드를 사용할 때보다는 덜했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디지털 드로잉을 하자. 손그림의 매력이야 말해 뭣하랴. 하지만 물리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꼼꼼히 따져보면 디지털 드로잉의 장점 또한 많다.
그리고 얼마 안가 제법 큰돈을 들여 16인치의 맥북프로와 와콤 태블릿을 새로 구입했다. 1제곱미터가 채 안 되는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또 빨리 치워야 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데스크톱보다는 노트북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필요하면 아이패드와 미러링 작업도 가능하니까 현재 처한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결정이었다.
새로운 도구와 새로운 툴에 익숙지 않았던 처음에는 손그림과 디지털 드로잉을 함께 했다. 종이에 그린 그림을 스캔해서 포토샵으로 불러들여 리터칭 또는 밑그림 삼아 다시 그리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따로 스케치하지 않고도 그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지금은 별다른 스케치 없이 바로 그린다.
대강의 구도와 덩어리들의 위치만 잡아 놓으면 밑그림 작업은 끝난다.
나이가 더 들고 좀 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손 그림이 그리워질 것도 같다. 음... 그때는 손 그림 그리면 되지 뭐...... 지금은 나의 작업 환경에 아주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