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예술_ 멀티페소나
아이를 키우는 건 잊고 지내던 과거 모습을 선명하게 회상시키는 과정인 것 같다.
아이가 흰 티셔츠에 정체 모를 얼룩을 묻혀온 것을 보니 문득 초등시절 흰 원피스를 입고 학교를 갔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감색 원피스에 하얀색 카라가 크게 있는 세일러복이었다. 하얀 카라가 반사광 역할은 해선지 얼굴이 화사해 보이던 그 옷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나는 예쁜 옷을 입고 기분 좋게 등교했다.
짝의 횡포가 있기 전까지 말이다. 옆자리 짝인 남자아이는 책상에 금을 그으며 지우개며 연필이며 선을 넘어오면 죄다 가져간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누가 봐도 7:3 정도로 불공평하게 그어진 선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일은 내가 먼저 와서 책상 금을 먼저 그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그 녀석이 볼펜으로 내 새하얀 카라에 볼펜으로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놀래서 뿌리쳤더니 내 옷이 선을 넘어왔다며 깔깔 웃었다. 눈물이 왈칵 났지만 나는 한심하게 이런 말을 했다. " 볼펜은 안 지워지니까 연필로 해"왜 하지 말라는 말을 못 했을까? 그때 나는 내 감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서툴렀다. 내 감정을 말해봤자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착한 아이로 지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던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착한 아이에 집착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울음조차 참고 있다가 하굣길 수업 끝나고 엄마가 속상해할 것 같아 화장실에서 울면서 비누칠로 옷을 빨았던 기억이 난다. 학창 시절 내내 큰 사고 치지 않고 때론 억울하지만 크게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재수시절 처음으로 연애를 하게 되었다. 수능이 정확히 10일 앞둔 날이었다. 학원 가는 길에 내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다고 들었다.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학창 시절 많은 학우들 사이에서 존재 감 없이 지내던 나를 꽤 오랫동안 짝사랑하며 나를 존중해 주던 친구였다. 힘든 시기 그를 믿고 의지했던 터라 그 시절 내 삶에 가장 큰 시련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슴팍을 쥐어잡은 채 근처 약국에 가서 마시는 우황청심원을 벌컥 원샷하고 그 친구 집 앞 놀이터로 갔다. 그네에 앉아 그가 오길 기다리면서 혹시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 등장하면 어쩌나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다행히 혼자 오는 그를 만났다. 놀라는 그에게 사실여부 판단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선전포고 했다.
그리고는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 또한 너와 정라 하려 했다며 최종 입장표명을 했다.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흥분하지 않은 상태로 이성적으로 그간의 만남을 정리하는 내 모습에 난 충격을 받았다.
"뭐야, 나 왜 이렇게 멋져?
내 감정을 이렇게 자세히 말할 수 있다고?
사전 준비 없이 조리 있게 말을 할 수 있다고?
놀이터 움푹 파인 그네 앞 모래어귀에서 나눈 마지막 인사는 꽤 당돌하고 멋졌다. 마치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내 안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내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연인을 잃었지만 멋진 나를 찾았다. 전혀 슬프지가 않았다.
학창 시절이 지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 많은 나를 만났다. 회사에서는 진취적이지만 상사에 의견을 존중하며 현명하게 내 의견을 개진하는 다른 나의 가면을 써야 했고, 맏딸로서 하고 싶은 말을 아껴가며 엄마아빠에겐 순종적인 K장녀 가면도 써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역할극은 점차 늘어났고 개인과 사회 집합체에서 수월하게 지내기 위한 일종의 타협이었다. 이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면이었다.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한 번쯤은 했을 것이다. 조직의 성격에 따라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면에 둘러싸인 엔소르 작품을 보면 형태와 색상이 각기 다른 가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 중앙의 붉은색 옷을 입고 꽃과 깃털로 장식된 붉은색 모자를 쓴 남자만 유일하게 가면을 쓰지 않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그만 유일하게 관람객들과 눈을 마주치고 있다. 나머지 가면은 누구도 자신 있게 눈이 정면을 응시하는 가면이 없다. 곁눈질을 하거나, 시선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조금은 기괴하거나 창백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가면의 수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는 인간이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산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 안에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대부분 야비하고 교활하고 어리석은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정적인 모습만 내재해 있을까? 우린 환경과 경험해 온 것들에 따라 그 비율이 조금 다를 순 있지만 내가 평소 보이던 모습보다 더 이타적인 가명이 씌워질 때도 있다.
전혀 가본 적도 없는 지구반대편 나라의 지진 속 아이들과 이재민들을 위해 집에 있는 옷가지를 챙겨 보내고 성금을 모금하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이가 억울한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 가족처럼 진심으로 기도하거나 그를 위해 국화꽃 한 송이를 사서 찾아가 명복을 빌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세상 냉정하고 냉철한 사람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종종 누군가는 도대체 진짜 당신의 모습이 뭐야?라고 의문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의 주체를 나로 바꾸면 대답할 수 있을 끼? 진짜 난 어떤 모습일까? 진짜 나는 누구일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이타적이거나 맹목적으로 베풀 수도 혹은 이기적이고 비열하거나 오만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가면을 갈아 끼울 때는 주변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게 선의를 베푸는 누군가를 만나면 나 또한 이타적인 가면을 같이 쓰게 된다.
모든 것을 부정하며 나를 짓밟으려 하는 대상을 만나면 나 또한 상대에게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고 행동 또한 소극적으로 대하게 된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상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상대가 어떤 가면을 쓸지도 어느 정도 정해지는 것이다. 내 앞에서 모습과 다른 이들 앞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가 있다면 나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봐야겠다. 내 안의 가면이 많다는 건 상황에 따라 나의 다양한 보호장구가 여러 개로 많아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에 두려워한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보호장비인 페르소나. 내 안의 페르소나가 너무 많아서 진짜가 뭔지 모르겠어라며 혼란스러워하기 전에 오늘 나는 나를 보호하고 단단하게 지켜 날건지에 대해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결국 저 수많은 가면들이 죄다 내 모습 들이니까, 내게 안 좋은 가면을 쓰게 하는 이들의 만남을 줄이면 그걸로 된 것이다.
오늘 나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