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은 눈물로, 기억은 온기로
“나는 지금, 왜 살아야 하지?”
그 질문 하나는, 누군가의 외로움을 대신 안으며, 조용히 답을 찾아갔다.
재발.
그 단어는 내 몸보다 마음을 먼저 무너뜨렸다.
다시 병원. 다시 치료. 다시 불안.
익숙하던 병실인데도, 그 어느 때보다 낯설고 차가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옆 침대 환자 한 분이 유독 조용했다.
미소도, 말도, 숨소리마저 줄어든 채 하루를 보내는 그 모습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날,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분의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고, 그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낮은 진동음.
그분은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문 너머, 작고 떨리는 목소리.
“생일 축하해요, 엄마.”
“응, 고맙다. 걱정 마. 친구들이랑 파티 중이야.”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창밖을 조용히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 무심한 뒷모습이, 어쩌면 더 크게 울렸다.
그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간호사님께 조심스럽게 외출 허락을 받고 시내로 향했다.
꽃 한 송이, 작은 케이크, 풍선 몇 개, 그리고 피자 여덟 판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환자분들께 도움을 청했다.
“그분을 잠시 밖으로 유도해 주세요.”
그때부터 우리는 작은 기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간호사님, 실습 나온 학생, 병실의 환자들까지 모두가 함께했다.
풍선 하나하나에 “생일 축하합니다”를 쓰고 천장에 달았다.
케이크엔 촛불을 꽂고, 병실의 불이 꺼졌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분은 문 앞에서 멈춰섰다.
우리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날, 우리는 그의 가족이 되었다.
피자를 나누고, 케이크를 나누며 병실에 모처럼 따뜻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후로도 많은 사연이 병실을 드나들었다.
그중 잊히지 않는 한 사람,
광주에서 작은 세탁소를 운영하던 나보다 네 살 위 여자 환자였다.
암이 몸을 잠식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일하다가 쓰러졌다고 했다.
그녀는 너무 말랐고, 너무 지쳐 있었다.
움직이기조차 힘든 그녀를 우리는 돌아가며 도왔다.
그녀의 삶은, 애틋했다.
남편은 외도를 일삼던 사람이었고, 어느 날엔 내연녀를 데리고 병실에까지 나타났다.
“보험이 어디 들어있는지 알려줘.”
차가운 목소리에,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물만 흘렸다.
그 모습을, 병실 모두가 지켜봐야 했다.
며칠 뒤, 그녀의 아들과 대학생 딸이 병문안을 왔다.
그녀는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남편 이야기를 딸에게 해 주고 싶어요. 보험 수익자도 바꾸고 싶고요.”
나는 그녀 옆에 앉아, 딸 앞으로 수익자를 변경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순간, 병실 사람 모두가 그녀의 편이 되어주었다.
한 달 뒤, 그녀는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더는 치료가 어렵다는 말을 남긴 채.
그리고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정말 고마웠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날 병실은 조용히 슬픔에 잠겼다.
항상 농담을 하던 환자도 말이 없었고,
나도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일주일쯤 뒤, 그녀의 딸이 다시 병실을 찾았다.
손엔 송정리에서 사온 멧돌 콩물이 들려 있었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아줌마에게 콩물 한 잔 드렸는데,
너무 맛있게 드셨다고 하셨어요.
그 말씀하시며, 꼭 다시 사다 드리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남긴 콩물 한 잔엔 마지막 감사와, 따뜻한 작별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그 질문을 떠올렸다.
“나는 지금, 왜 살아야 하지?”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대답할 수 있었다.
“삶이라는 병실 안에서, 누군가의 가족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