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 빛 Mar 22. 2023

삶의 터전을 떠나다

2019년 8월 1일

 D-Day 불체 전

미국에 도착한 날 _ (아직은 불체 전)





항공편으로 내가 꿈꾸던 도시중 한 곳인 뉴욕에 도착했다. 출국 전에 만났던 지인분들이 어디로 이민을 가냐고 물어오면 미국에 간다고 대충 둘러대긴 했으나 사실은 출발 직전까지도 망설임이 있었다.



파리에 가야 하나, 뉴욕에 가야 하나, 어디를 가든 여행비자가 만기 되고 나면 불법체류로 전환될 것이 뻔했으니. 이 두 도시는 나한테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학창 시절 나의 전공은 불어라 언어적응면에 있어서는 어쩌면 파리에 가는 것이 더 적합했을 수도 있었으나 단지 출발 직전 비행기표가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막판의 짧은 고민 끝에 덥석 뉴욕행을 택했다. 가서 살 집은 알아보지 않은 상태였다.



2019년 8월 1일 현지시간으로 점심 12시 30분 뉴욕 John F. Kennedy 공항에 도착했고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산다는 퀸스(Queens) 구에 있는 플러싱(Flushing) 지역으로 가는 택시에 올랐다. 목적지가 불분명하니 어디로 가냐는 기사님의 질문에 플러싱 한아름(H mart) 슈퍼마켓으로 가달라고 대답했다.



한아름은 미국에서 가장 큰 한인 슈퍼마켓 체인점이다. 알고 보니 플러싱 지역에는 한아름 슈퍼마켓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길을 잃은 듯한 이 어리둥절 해 보이는 사람에게 기사님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말 그대로 아무 한아름에나 내려다 준 것이다.



택시비는 팁까지 더해서 23불, 공항과 10~20분 거리에 있는 이곳 플러싱은 영화나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뉴욕시내 전경이 아니다. 체감상 마치 1990년대에 머물러 있는 잘 정돈되지 않은 혼돈의 지역이다. 적어도 지하철과 식당가가 몰려있는 다운타운 플러싱은 그랬다.



어쩌면 화려한 뉴욕 도시삶의 꿈이 와장창 무너질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700불을 들고 온 현 상황에서 이곳은 일자리가 많은 맨해튼과 가깝고 나는 차도 없고 운전할 줄도 모르니 대중교통이 잘 통하고 생활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하면 장땡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길가 "공고란"이 이곳 플러싱에는 아직 곳곳에 존재했다. 내가 처음 도착한 한아름 슈퍼마켓 주차장에도 전단지들이 공고란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어떤 중국사람이 월세를 맡고 사는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 한 방을 골라 방문하기로 했다. 이를 서브리스(sublease)라고 한다. 월세입자의 전대입자. 이유인 즉 이 집이 큰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가기에 도보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보증금도 중개인도 필요 없었고 갖고 있던 500불을 지급하고 바로 오늘부터 세 들어 살 수 있었다. 은행계좌도 전화번호도 없는 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덥석 방 한 칸을 세놓는 것을 보아하니 아마 이 세입자 분도 당시 현금이 급했던 것 같다.

 


간단히 짐을 풀고 주인이 방을 비워준답시고 복도에 내놓았다는 삐걱이는 매트리스를 도로 내 방으로 질질 끌고 들어 왔다. 그 위에 분리수거대에서 구해온 골판지 상자를 휴지로 슥슥 닦은 후 반듯이 폈고 캐리어에서 얇은 담요를 꺼내어 깔았더니 침구세트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물론 진드기(Bed bug)가 있는지 육안으로 꼼꼼히 점검을 마친 뒤였다.



세 주인과 나는 짧은 대화를 나눴다. 일자리가 있냐 의사소통은 괜찮냐 등. 아무 연고도 일자리도 없다는 나의 황당한 대답에 세 주인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네일가게를 열었는데 직원이 부족하다면서 나보고 거기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내가 언제 이것저것 따질 처지인가! 나는 밤낮이 바뀌었다는 사실도 오늘 한 끼도 안 먹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이런 날은 아주 드물다. 내 배꼽시계는 항상 정확하다.) 내일부터 출근이 가능하다고 확답을 주었다.



어느새 저녁 열 시, 나의 뉴욕생활 첫날은 이렇게 거창한 환영식도 좁은 잔에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샴페인도 없이 무미건조하지만 안전하고 보람 있게 지났다.



자야 한다. 잠들어야 한다. 내일은 미국에서의 첫 출근이니.







North/South Lake 409 N Lake Rd, Hunter, NY 12436 g  _ 하늘과 호수가 뒤집힌 어느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