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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여우 Oct 04. 2024

계란말이 잘하는 집으로 가자 외 7편

푸른여우, 하루하나 : 2024년 9월

  머리말


   입추 때도 덥고, 처서 때도 덥고, 백로 때도 덥고, 추분이 지나서야 드디어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선선'이라는 말이 어울리기나 할까요? 저는 그만 어젯밤에 보일러를 틀어버렸답니다. 옛날 어느 전쟁에서 외국 병사들이, 오락가락하는 한국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매해 견디고 사는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일까요. 문득 자부심이 듭니다.

   그런 무더운 와중에 이번 달은 추석 연휴가 있었습니다만, 잘 쉬시면서 보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란 뭉치면 싸우고 흩어지면 그리워지는 아이러니한 생물인지라, 매번 추석 때만 되면 집집마다 고함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리는 경우도 있는데요. 저희 집은 옹기종기 모여서 전을 부치면서 다소 평화롭게 연휴를 보냈던 터라, 돌이켜보면 행복이란 건 거창한 무언가 없이 그런 '오순도순함'을 간직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8가지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추석 복 많이 받으세요.)




  꿈


    "네가 나한테 고백하는 꿈을 꿨어."

    "꿈은 반대래요."

    "근데 네가 거짓말이라고 그랬지."

    "그럼 예지몽인가 보네요."






  감자탕집 아들과


   "너 옛날에 우리 집 감자탕 한다고 놀렸잖아."

   "응, 그치."

   "그리고 성인 되더니 술 마실 때마다 우리 가게 오고."

   "그야..... 몰랐으니까. 너희 집 감자탕이 그렇게 맛있는 줄."

   "어쩌냐, 우리 가게 다음 달에 문 닫아."

   그러자 잠시 뒤,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어릴 적 일에 대한 사과를 이십 년 만에 받았다.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말없이 라면사리를 넣어주었다.






  계란말이 잘하는 집으로 가자


   "어디로 갈까."

   회의가 끝나고 둘이서 술 마시러 갈 때 이 질문은 항상 나왔으나, 항상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우리가 가는 곳은 항상 건널목에 있는 삼겹살 집으로 정해져 있었기에. 그러므로 나는 여느 때처럼 '뭘 어딜 가, 그냥 거기로 가'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계란말이 잘하는 집으로 가자."

   동기의 대답은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왜 계란말이냐는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나도 왠지 모르게, 계란말이가 먹고 싶어졌다. 그냥 계란말이가 아니라, 안주로 만들어진 계란말이를.






  번지점프 에세이


   흔히 사람들이 버킷리스트로 번지점프를 들곤 하는데, 나는 뛰어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그것이 번지점프 회사의 마케팅 전략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안전장치를 매단 채, 눈앞에는 푸른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발판 위에 서 있었다.

   카운트다운 하겠습니다. 아까 밑에서 봤던 무서운 아저씨의 목소리가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나는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 채로,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번지에 맞추어 눈을 질끈 감은 채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어어. 중력이 붙는 게 몸소 느껴졌다. 이쯤 되면 다 떨어졌겠지 싶었는데, 눈을 뜨니 아직 중간밖에 오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몇 번을 다시 튀어 올랐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고 했다. 나는 다리를 떨며 차로 돌아가면서, 뛰어내릴 때 느꼈던 감정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깨닫기를, 나는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뛰어내린 것이 아니었다. 뛰어내리기 직전에, 만약 뛰어내리지 못하면 저 무서운 아저씨한테 한 소리 들을까 봐, 그게 두려워서 뛰어내렸다. 타인의 시선. 그게 뛰어내리면서 내가 들여다본 내면이었다.

   그때부터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내가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후회 없는 판단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걸 보면, 번지점프도 살면서 한 번은 뛰어내려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추석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나, 어느 날 농경신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때 이 근방에 끝없이 펼쳐졌던 논밭에는, 이제 아파트와 건물만이 위세 있게 늘어서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보름달을 보면서 풍작을 기원하던 것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고, 앞으로 몇 세대가 지나면 보름달에 소원을 비는 일도 미신으로만 치부되지 않을까 싶었다.

   추석이 되었고, 농경신은 동네 여러 신들을 집에 불러들여 다 같이 전을 부쳤다. 제사를 받는 존재인 그들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전을 부치는 모습은 누가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즐거웠다. 가족들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옛날부터,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지금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이 유전자에 배어있던 그들에게 있어서, 혼자 산다는 것은 어색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 어색함을 이렇게 전이나 부치는 때에야 그들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고구마전, 호박전, 산적까지 여러 음식들이 노릇노릇 익어 바구니에 놓였다. 이 음식들은 아마 추석이 끝날 때까지 반찬으로 올라올 터였다. 농경신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는 숨을 내쉬었다. 이번 추석 연휴는 날씨가 무척 더웠다. 기상청에서는 계절을 재조정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는 모양이다. 사계절도 어느새 옛날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고 가라는 말에도, 이래저래 바쁜 동네 신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농경신은 적적함을 떨쳐내려 유튜브를 틀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딱히 우체국에 보낼 생각은 없었지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도 잊고 저 멀리 뜬 보름달을 보며 빌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풍요로움을 심어주시옵소서. 안녕. 이 한 마디만이라도 달빛처럼 온 세상에 전해주시옵소서.






 백로白露


   "옛날에 어머님들은, 직접 입으로 포도 껍질이랑 씨를 발라서 자식에게 먹여주셨다구. 그렇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도지정(葡萄之情)이라고 해. 포도지정을 잊지 말길 바라."

   그러나 고문헌을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여러 신문 기사와 칼럼에서 출처 언급 없이 '옛날에 이런 말을 썼다'라고 두루뭉술하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었다. 출처나 유래를 알 수 없다는 유령 한자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무수한 한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어느새 생성되어 버린 한자처럼, 이 '포도지정'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인지.

   이 시기를 조사해 보면 유난히 포도와 관련된 얘기가 많았다. 포도순절(葡萄旬節). 백로에서 추석까지를 이르는 말. 포도지정(葡萄之情). 어머니가 입으로 포도의 씨와 껍질을 발라내어 아이에게 먹여주던 정. 그러나 둘 다 고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검색해 보면 뉴스 기사에는 나온다. 과거 어느 때 실제로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말. 이 단어를 처음 수록한 사람은 그 단어를 실제로 들은 것일지, 들었다고 착각한 것일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일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포도지정을 잊지 말길 바라. 나는 다른 의미로 그 단어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스티 드라이브


   집에서 혼자 누워 있었다. 저번주에 헤어진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을 지워나가다가 문득 드라이브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면허는 없었다. 필기시험에서 차선 구분을 못해 떨어졌다. 그러나 드라이브를 가고 싶었다. 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며, 내가 원하는 드라이브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조수석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뒷좌석에도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날씨는 비가 내려야 했다. 달리는 장소는 어디든 좋았다. 단지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면 되었다. 그리고 운전석에는, 그래. 

   운전석에는 아빠가 있어야 했다. 어릴 적에 우리 집은 월말에는 꼭 여행을 갔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고, 아빠는 이따금 아는 노래가 나오면 조용히 흥얼거리셨다. 내가 떠나고 싶은 드라이브는 그런 형태였다. 온 가족이 빗속을 뚫고 어딘가로 달려야 했다. 어디까지라도 이어져 있을 듯한 길을 함께 달려야만 했다.






 추분秋分


   "접니다."

   그 말에 국왕은 아무 말도 않은 채, 입에 갖다 댔던 차를 탁상 위로 내려놓았다. 자수의 말을 뱉은 관원을 보는 눈빛은 얼핏 다정해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눈동자에는 증오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이윽고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추분도 되었으니, 반란을 꿈꾼 관원들을 참수하라고 자네에게 지시했네. 봄에 조사하기로 반란자는 총 여섯 명이었으나, 붙잡힌 관원은 정작 다섯 명이었지. 아무리 그들을 고문해도 남은 한 명의 이름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는데. 방금 자네는, 그 마지막 한 명이 자신이라고 밝혔어. 이유가 뭔가."

   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정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이 도모했던 반란이 봄에 한 차례 꺾였을 때, 붙잡힌 동료들은 운 좋게 체포되지 않은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끔찍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고문 현장에는 자신도 참석했다. 피 흘리는 동료들의 옷에 꽃잎이 흩날렸다. 혼자 남은 그는, 다음 계절에는 세상이 나아져 있기를 빌었다. 한 번도 임금이라 여긴 적 없던 이 자에게 천벌이 내려지기를 빌었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은 반란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바로 결단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봄, 여름, 초가을에 이르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기도. 언젠가 저잣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거지가 '도와주신다면 기도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자신은 그 거지를 경멸하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렇게 따지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은 그 자의 최측근에서, 권력에 누구보다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고한 죄로 옥에 들어가는 이들은 늘어갔고, 그 사이에서 옥에 갇힌 동료들에게 식사량을 좀 더 늘려주는 식으로 자신이 선행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이러다가 언젠가 풀려나겠지, 영웅이 나타나주겠지.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형 집행은 추분 이후에 실시한다. 그렇게 추분이 되었다. 다섯 명의 동료는 반란을 도모했으나 바로 죽지 않았다. 남은 한 명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목숨을 유지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반란을 달성하지 못한 분노로 몇 달을 지새웠다. 그리고 어제, 날씨가 부쩍 선선해진 어제, 결국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이 내려왔다. 처음에는 자신을 마지막 남은 한 명의 반란자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들지 못한 채로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것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선택지임을 알았다. 너의 손으로 너의 우유부단한 삶에 마침표를 찍어라.

   그리고 하늘이 너무나도 높아 보이는 오늘, 그는 자신이 마지막 남은 한 사람임을 시인했다. 그리고 왕은 왜냐고 물었다. 등에 숨긴 활을 움켜쥐었다. 그간 잃어버렸던, 아니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그 활을 다시 꺼내 들었다. 지금부터 밤은 더 길어질 것이다. 밤이 더 길어지기 전에 이 어중간한 인생에 마침표를 찍자. 그는 단지 우스갯소리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말했다.

   "가을걷이는 하고 죽어야겠다 싶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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