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 2단계 : 끝없는 질문 “왜?”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잖아. 네가 잘 키울 그릇이 되니까 너한테 온 거야.”
누가 그랬더라? 이 말을 누가 나에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이다. 누군지 기억난다면 내가 그 사람 볼 때마다 몰래몰래 머리카락 하나씩 뽑고 싶을 테니까.
신기한 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도 어디서 한 번쯤은 이와 비슷한 말들을 들어 봤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위로랍시고 저런 말을 할까? 하지만 우리는 반문하고 싶다.
"What? 그릇이 된다고요? 누가요? 내가요? 하하하.... 저 아세요?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모자란 사람인데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그리고 그럴 만한 그릇이 안 되는 나에게 이렇게 힘든 아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질문을 해 대기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동안 나름 착하게 살았는데 왜 대체 뭐가 문제일까? 왜...?
박사논문 쓰고 아직 몸이 엉망인 상태에서 아기를 가져서일까? 임신 초기에 무리하게 출장 가서 밤샘해 가며 일을 해서 태아에게 안 좋았던 걸까? 아, 나 거기서 엉덩방아도 한번 찧었는데......
임신 중에 일을 너무 많이 했나? 인스턴트, 레토르트 식품을 너무 많이 먹었나? 아기 작다고 했는데 고기를 충분히 안 먹었나? 타이레놀 한 알 먹었었는데, 그거 때문일까? 위경련 났을 때 먹은 약이 문제가 있었던 걸까? 산부인과에서 처방해 준 거라 그냥 먹었는데 그게 잘못된 거 아닐까?
아니야, 내가 태교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럴 수도? 뱃속 아기 태명 한 번 사랑스럽게 불러주지 않고 큰아이만 챙겨서 그런가? 왜, 왜지? 대체 왜 내 아이가 장애를 가진 걸까?
혹시, 설마, 내가 둘째를 순수하게 원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 첫째랑 놀아주기 너무 힘들어서 '동생이라도 있으면 날 덜 괴롭히겠지'라는 얄팍한 마음으로(이건 진짜다!! 90% 그 마음으로 둘째를 가졌다.) 가진 거라서 그래서 하늘이 나에게 벌을 주나?
이 "왜" 시리즈는 한번 시작되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날밤을 새도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가 울어 보채고 굉장히 정신없는 상황이 와도 머릿속에서 가동되는 이 "왜" 공장은 멈추지 않고 질문을 찍어 낸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것이 있다면 다 찾아 나열하는 것이다. 심증은 있으되 물증이 없는 그 모든 가능성들을.
그러나 우리 아이는 "상세 불명의", 즉 의사들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뇌병변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린다 해도 과학적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종국에는 내가 둘째를 가질 때 마음을 곱게 쓰지 않아서, 둘째를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욕심에, 나 대신 첫째랑 놀아줄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졌으니 하늘에서 보고 "요 괘씸한 녀석, 너 마음보 그렇게 쓰지 마라"며 나에게 벌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굉장히 샤머니즘적이고 비과학적인 쪽으로 내적 결론이 흘러가기도 했다.
당시 나는 신을 믿지 않는 무종교인이었고, 또 과학적으로 연구를 해 오던 연구자였음에도 나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게 비과학적인 추론을 하고, 또 어느 정도는 그렇게 믿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성이 아직 살아 있어서 굿하고 치성을 드리면 아이의 장애가 나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다. 다만, 심적으로만 계속 "내가 000 해서 아이에게 장애가 생긴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떠오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왜" 시리즈의 마지막 질문들은 사실 한 번도 가족들에게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을 말해 버리는 순간, 그대로 그게 진실이 되어 버릴까 봐서... 그래서 이 모든 게 온전히 다 "네 탓이다, 네 잘못이다" 하며 비난의 화살을 나에게 돌리게 될까 무서웠다. 내가 혼자 내 탓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누군가가 나에게 "너 때문이다" 하면 그땐 정말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이렇게 내 잘못으로 귀결되는 질문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은 누가 나에게 비난을 퍼붓기라도 한 양, 나 자신의 변호인이 되어 나를 옹호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아니 뭐, 나만 일하면서 아기 가졌나? 그럼 세계의 워킹맘들은 다 장애 아이 낳겠네?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도 멀쩡히 건강한 아이 쑥쑥 잘만 낳더라.
그리고, 응? 입덧 때문에 제대로 못 먹고 살 삐쩍 삐쩍 말라 가는 사람들도 아기 건강하게들 잘 낳던데, 내가 고기를 대체 얼마나 더 먹어야 되는 거였니? 먹을 만큼 먹었잖아!!!
또, 태교도 그래. 원래 둘째는 태교 못하는 거 아냐? 일하랴 첫째 돌보랴, 뱃속의 아이에게 다정히 말 걸어 줄 시간이 어딨어? 그냥 첫째랑 인형놀이하고 첫째한테 책 읽어 주는 거 그게 태교지 뭐. 나만 그래?
그리고. 나만 이렇게 얄팍한 마음으로 아기 가져? 다들 정말 아기를 너~무~ 사랑해서, 원해서, 그래서 갖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랬다고 벌 받는다는 게 말이 되냐? 왜 그렇게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니, 나님아?
그렇지? 그래.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자, 그럼 왜? 왜 나야? 왜 나냐고? 왜 내 아이에게만 장애가 있는 거야?
자, 이후부터는 도돌이표다. 나를 옹호하기 시작하다가 뭔가 억울해진다. 내 잘못이 아니다, 하다 보니 그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또 질문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신은 정말 내가 감당할 그릇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아이를 나에게 보낸 것인가? 아닌데, 나는 그릇이 간장종지만 한데, 왜 나일까? 아, 내가 임신 때....... 그렇다. 결국 다시 원점이다.
혹시 주변에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 따위의 말은 하지 말자. 최악의 위로다. 그냥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말고 먹을걸 사 주자. 달고 맛있는 걸로. 맵고 짠 것도 된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떠냐고? 아직도 저 질문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느냐고? 아니다. 다행히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 앞의 부정하기 단계와 "왜"에 천착하기 단계로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내 아이가 장애인이라는 것은 이미 깊숙이 받아들였으며, 나름대로 "왜"에 대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다. "왜"가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 원인이 무엇이었든, 내 아이는 이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나는 그저 이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것만 고민하면 된다. 내 잘못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이의 장애가 나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계산하고 의도한 결과가 아니기에 나는 무죄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아이의 장애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책망하기를 멈추고 그저 함께 잘 살면 된다.
자꾸 누구의 "잘못"인지 생각하고 말하다 보면, "장애 아이 = 잘못"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사랑받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랑받아 마땅한 우리 아이가 정말 "잘못"이란 말인가?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잘못"의 결과일 수는 없다. 같은 맥락으로, "장애 아이 = (신이 주신) 시련"이라는 등식도 성립할 수 없다. 아이는 잘못이고 시련이 아니다. 벌도 아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신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아이가 다 사랑스럽지 않을까? 그 아이가 장애 아이든, 비장애 아이든, 어느 성별이든, 어떤 외모를 가졌든 상관없이 모두 사랑해 마지않을 것이다. 그중 특별히 사랑스러운 아이를 매번 골라 세상에 보내는 걸 텐데, 그렇게 보내진 아이를 놓고 인간들이 시련이네, 벌이네, 하며 우는 걸 보면 신도 참 억울하고 이것도 못해 먹을 짓이다 생각하지 않을까?
아무튼, 신의 마음까지야 나는 모르겠다만,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건 결국 인간의 일이다. 인간들이 그와 같은 경계를 나눈 것은 맞지 않는가? 인간들이 나눠 놓은 불명확한 경계 때문에 너무 상처 받지 말자는 게 나의 지론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 하나가 "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장애를 가진 채 세상에 왔는데, 그런 인간 세상에서 살려니 참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불편을 뛰어넘어 어떻게 잘, 아주 잘, 살 것인지 그것만 고민하면 된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다음 편에서는 아이랑 같이 잘 살고 싶지만 이래저래 능력이 부족해서 자책하는 "못난" 엄마의 모습이 나온다. 원인 찾으며 자책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참 모자라서 자책을 한다. 이건 아직도 한다. 이 얘기는 다음 단계에서 더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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