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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Dec 19. 2020

왜 나야? 왜 하필 나냐고!!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 2단계 : 끝없는 질문 “왜?”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잖아. 네가 잘 키울 그릇이 되니까 너한테 온 거야.”


  누가 그랬더라? 이 말을 누가 나에게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행이다. 누군지 기억난다면 내가 그 사람 볼 때마다 몰래몰래 머리카락 하나씩 뽑고 싶을 테니까.

  신기한 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도 어디서 한 번쯤은 이와 비슷한 말들을 들어 봤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안 그래도 힘든 사람에게 위로랍시고 저런 말을 할까? 하지만 우리는 반문하고 싶다.


  "What? 그릇이 된다고요? 누가요? 내가요? 하하하.... 저 아세요? 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모자란 사람인데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그리고 그럴 만한 그릇이 안 되는 나에게 이렇게 힘든 아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질문을 해 대기 시작한다.


왜 그랬을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동안 나름 착하게 살았는데 왜 대체 뭐가 문제일까? 왜...?

박사논문 쓰고 아직 몸이 엉망인 상태에서 아기를 가져서일까? 임신 초기에 무리하게 출장 가서 밤샘해 가며 일을 해서 태아에게 안 좋았던 걸까? 아, 나 거기서 엉덩방아도 한번 찧었는데......

임신 중에 일을 너무 많이 했나? 인스턴트, 레토르트 식품을 너무 많이 먹었나? 아기 작다고 했는데 고기를 충분히 안 먹었나? 타이레놀 한 알 먹었었는데, 그거 때문일까? 위경련 났을 때 먹은 약이 문제가 있었던 걸까? 산부인과에서 처방해 준 거라 그냥 먹었는데 그게 잘못된 거 아닐까?
 
아니야, 내가 태교를 제대로 안 해서 그럴 수도? 뱃속 아기 태명 한 번 사랑스럽게 불러주지 않고 큰아이만 챙겨서 그런가? 왜, 왜지? 대체 왜 내 아이가 장애를 가진 걸까?

혹시, 설마, 내가 둘째를 순수하게 원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 첫째랑 놀아주기 너무 힘들어서 '동생이라도 있으면 날 덜 괴롭히겠지'라는 얄팍한 마음으로(이건 진짜다!! 90% 그 마음으로 둘째를 가졌다.) 가진 거라서 그래서 하늘이 나에게 벌을 주나?


  이 "왜" 시리즈는 한번 시작되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날밤을 새도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가 울어 보채고 굉장히 정신없는 상황이 와도 머릿속에서 가동되는 이 "왜" 공장은 멈추지 않고 질문을 찍어 낸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것이 있다면 다 찾아 나열하는 것이다. 심증은 있으되 물증이 없는 그 모든 가능성들을.

  그러나 우리 아이는 "상세 불명의", 즉 의사들도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뇌병변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린다 해도 과학적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종국에는 내가 둘째를 가질 때 마음을 곱게 쓰지 않아서, 둘째를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욕심에, 나 대신 첫째랑 놀아줄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졌으니 하늘에서 보고 "요 괘씸한 녀석, 너 마음보 그렇게 쓰지 마라"며 나에게 벌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굉장히 샤머니즘적이고 비과학적인 쪽으로 내적 결론이 흘러가기도 했다.

  당시 나는 신을 믿지 않는 무종교인이었고, 또 과학적으로 연구를 해 오던 연구자였음에도 나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게 비과학적인 추론을 하고, 또 어느 정도는 그렇게 믿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이성이 아직 살아 있어서 굿하고 치성을 드리면 아이의 장애가 나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다. 다만, 심적으로만 계속 "내가 000 해서 아이에게 장애가 생긴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떠오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왜" 시리즈의 마지막 질문들은 사실 한 번도 가족들에게 입 밖에 내어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을 말해 버리는 순간, 그대로 그게 진실이 되어 버릴까 봐서... 그래서 이 모든 게 온전히 다 "네 탓이다, 네 잘못이다" 하며 비난의 화살을 나에게 돌리게 될까 무서웠다. 내가 혼자 내 탓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누군가가 나에게 "너 때문이다" 하면 그땐 정말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이렇게 내 잘못으로 귀결되는 질문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은 누가 나에게 비난을 퍼붓기라도 한 양, 나 자신의 변호인이 되어 나를 옹호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아니 뭐,  나만 일하면서 아기 가졌나? 그럼 세계의 워킹맘들은 다 장애 아이 낳겠네?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도 멀쩡히 건강한 아이 쑥쑥 잘만 낳더라.

그리고, 응? 입덧 때문에 제대로 못 먹고 살 삐쩍 삐쩍 말라 가는 사람들도 아기 건강하게들 잘 낳던데, 내가 고기를 대체 얼마나 더 먹어야 되는 거였니? 먹을 만큼  먹었잖아!!!

또, 태교도 그래. 원래 둘째는 태교 못하는 거 아냐? 일하랴 첫째 돌보랴, 뱃속의 아이에게 다정히 말 걸어 줄 시간이 어딨어? 그냥 첫째랑 인형놀이하고 첫째한테 책 읽어 주는 거 그게 태교지 뭐. 나만 그래?

그리고. 나만 이렇게 얄팍한 마음으로 아기 가져? 다들 정말 아기를 너~무~ 사랑해서, 원해서, 그래서 갖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그랬다고 벌 받는다는 게 말이 되냐? 왜 그렇게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니, 나님아?

그렇지? 그래.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자, 그럼 왜? 왜 나야? 왜 나냐고? 왜 내 아이에게만 장애가 있는 거야?   


  자, 이후부터는 도돌이표다. 나를 옹호하기 시작하다가 뭔가 억울해진다. 내 잘못이 아니다, 하다 보니 그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또 질문하게 된다, 그러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신은 정말 내가 감당할 그릇이 있다고 생각해서 이 아이를 나에게 보낸 것인가? 아닌데, 나는 그릇이 간장종지만 한데, 왜 나일까? 아, 내가 임신 때....... 그렇다. 결국 다시 원점이다.  


  혹시 주변에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신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 따위의 말은 하지 말자. 최악의 위로다. 그냥 차라리 아무 말을 하지 말고 먹을걸 사 주자. 달고 맛있는 걸로. 맵고 짠 것도 된다.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떠냐고? 아직도 저 질문의 소용돌이 속에 갇혀 있느냐고? 아니다. 다행히 무사히 빠져나왔다. 이 앞의 부정하기 단계와 "왜"에 천착하기 단계로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내 아이가 장애인이라는 것은 이미 깊숙이 받아들였으며, 나름대로 "왜"에 대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것이다. "왜"가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 원인이 무엇이었든, 내 아이는 이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나는 그저 이 아이와 함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것만 고민하면 된다. 내 잘못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이의 장애가 나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계산하고 의도한 결과가 아니기에 나는 무죄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중 아무도 아이의 장애를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책망하기를 멈추고 그저 함께 잘 살면 된다.

  자꾸 누구의 "잘못"인지 생각하고 말하다 보면, "장애 아이 = 잘못"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다. 사랑받기 위해 세상에 온, 사랑받아 마땅한 우리 아이가 정말 "잘못"이란 말인가?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가 "잘못"의 결과일 수는 없다. 같은 맥락으로, "장애 아이 = (신이 주신) 시련"이라는 등식도 성립할 수 없다. 아이는 잘못이고 시련이 아니다. 벌도 아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신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아이가 다 사랑스럽지 않을까? 그 아이가 장애 아이든, 비장애 아이든, 어느 성별이든, 어떤 외모를 가졌든 상관없이 모두 사랑해 마지않을 것이다. 그중 특별히 사랑스러운 아이를 매번 골라 세상에 보내는 걸 텐데, 그렇게 보내진 아이를 놓고 인간들이 시련이네, 벌이네, 하며 우는 걸 보면 신도 참 억울하고 이것도 못해 먹을 짓이다 생각하지 않을까?

  아무튼, 신의 마음까지야 나는 모르겠다만,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건 결국 인간의 일이다. 인간들이 그와 같은 경계를 나눈 것은 맞지 않는가? 인간들이 나눠 놓은 불명확한 경계 때문에 너무 상처 받지 말자는 게 나의 지론이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 하나가 "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장애를 가진 채 세상에 왔는데, 그런 인간 세상에서 살려니 참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아이와 함께,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불편을 뛰어넘어 어떻게 잘, 아주 잘, 살 것인지 그것만 고민하면 된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는  아니다. 다음 편에서는 아이랑 같이  살고 싶지만 이래저래 능력이 부족해서 자책하는 "못난" 엄마의 모습이 나온다. 원인 찾으며 자책하는  아니라, 내가    있는   모자라서 자책을 한다. 이건 아직도 한다.  얘기는 다음 단계에서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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