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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an 27. 2022

이혼을 받아들인 계기 (2)

가스라이터의 무서운 사고체계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도 여전히 이혼을 하겠다고 확신을 하지 못했는데, 억울하고 말고를 떠나서 이 대화를 주고받은 뒤 이혼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넌 부부나 연인이 평등하다고 생각해? 부모-자식 관계가 평등하다고 생각해?”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런 질문이 성립하는지를…… 머리가 새하얘져서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약간 벙쪘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한 거 아니야?”

“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어. 부부는 당연히 평등하지. 연인도 당연하고. 물론, 부모님은 어른이시고 윗사람이시지. 하지만 소통하고 관계 맺고 이런 건 평등하지. 물론, 세대가 다르니까 가부장적이거나 보수적인 면모도 있으시지만, 난 부모님과 평등한 관계에서 이야기하고, 세경이, 세오(동생들)도 마찬가지인데. 이게 당연한 거 아니야?”

“넌 어떻게 부모님과 우리가 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외국어도, 외계어도 아니고 분명히 한국어인데 무슨 말인지 도저히 해석 불가였다.


“친구들은? 넌 그럼 회사 동료는 어때? 상사도 있잖아. 그리고 너 네 상사에게는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어? 상사는 싫어도 참고 그랬잖아.”

“친구들이야 당연히 평등하고. 평등하지 않은데 어떻게 친구관계일 수가 있어. 평등하니까 친구지. 회사는 좀 다르긴 하지. 직급도 있고 상사는 확실히 내 윗사람이지.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아 할까. 조직이니까 위계질서는 있지만 대체로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회사에 다녔으니까. 상사이긴 해도 대체로 내 의견을 귀담아 들어주시고 문제가 있으면 같이 조율해나가고 대체로 그렇게 살아온 것 같은데.

맞아. 상사에게 잘 보이려고 했지. 아무리 좋은 상사라도 회사라는 특성상 상사와 내 관계는 평등하지 않잖아. 그분은 내 인사권을 갖고 있고 업무 배분도 하고, 업무 평가자이기도 하고, 내 승진이나 급여 인상에 그분은 많은 영향을 끼치잖아. 그러니까 잘 보여야지. 한 팀이니까 상사의 고민을 어떻게 덜까 같이 고민하는 게 내 역할이기도 하고. 그래야지 서로 윈윈하지. 때로는 상사가 내 마음 같지는 않아도 참을 때도 있고. 영인 씨는 어떤데?”


내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는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일단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그가 하는 말을 듣기로 했다.


“난 모든 인간관계는 갑을 관계라고 생각해.”

!!!!!

“뭐라고?”


정말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여과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부모와 자식, 친구, 지인 모두 관계에 위계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어떨 때는 위계가 역전하고 뒤바뀌기도 하지. 그럼 아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잘 보여야겠지. 왜냐하면 뭔가 얻어낼 게 있으니까. 그러려고 참는 거야. 목적을 달성하려고.”

“그럼 영인 씨는 친한 친구 있잖아. 그분과도 갑을관계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

“난 그 친구에게 얻어낼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잘 보이려고 하는 거지. 참는 거고.”

"그럼 우리 연애할 때는? 그때 난 우리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 그때도 참은 거야?"
"당연하지."
"참았다고? 대체 왜?"
"너를 좋아하니까. 너를 얻으려고. 너에게 잘 보이려고."


 ????? '얻는다'라니. 내가 무슨 전리품이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어서 말하길


"나는 그 참는다는 게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참는 건 힘들잖아. 보통 부정적인 의미 아니야? 물론, 나도 가족관계에서 참을 때도 있지. 그럼 할 수 있는 만큼은 그대로 감수하거나 되도록이면 얘기를 해서 풀거나 그러잖아. 그런데 그걸 막 '내가 참고 있어'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 왜냐하면 가족이니까. 부부니까. 친구니까. 그냥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받아들이는 거야. 그런 게 사랑 아니야?

지금 우리가 쓰는 '참는다'라는 함의가 같은 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 사용하는 단어가 다른 건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난 항상 너무 답답한 거야.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전혀 이렇지 않거든. 대화할 때 의견 차이는 있더라도 막힘은 없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영인 씨와 얘기할 때는 서로 사용하는 단어부터 통일이 안 되는 기분이 들어.

그래, 모든 관계가 궁극적으로는 서로 정서적 안정이든 경제적 이득이든 뭔가를 얻으려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니까 형성을 하지. 그렇다고 부부나 연인, 부모와 자식, 친구 관계를 갑을관계나 위계적인 관계라고 표현하지는 않아. 회사나 어느 조직에서나 그렇지. 모든 관계가 위계관계이면 피곤하고 힘들어서 어떻게 살아가니. 회사는 그래서 힘드니까 부부나 연인, 친구, 가족 같은 관계에서 위안을 삼는 거잖아. 모든 관계를 갑을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자신 스스로 너무 힘들 거 같은데?”


"그리고 너는 나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은 없어?"

"???"

"사람이 좋아하면 잘 보이고 싶어하잖아. 그런데 넌 나에게 전혀 그렇지 않은 거 같아."


우리가 지금 처음 만난 사이냐고. 연애 3년에 결혼해서 부부로 산 지가 4년인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물론, 나도 자기를 사랑하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잘 보이고 싶지. 그런데 이제는 그걸 '이 사람에게 잘 보여야겠다?' 그렇게 인지하는 것 같지는 같아. 그냥 너무 당연하니까. 잘 보이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무조건적으로 이 사람 편이 되어주고 아낌없이 사랑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나한테는 부부, 가족, 연인, 친구가 다 그런 존재들이야.

가끔 자기는 사랑도 '기브앤테이크'라고 표현을 하는데 나는 그게 참 이상했어. 사랑이라는 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서로 나눠가면서 조금씩 크기를 키워가고 점점 깊어지고 서로를 잘 알고 그런 거잖아. 네가 이만큼 해주면 내가 이만큼 해주겠어, 이런 식이 아니라. 그런데 뭔가 영인 씨는 물론 때때로 깜짝 선물도 하고, 센스도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내가 먼저 뭔가를 해야지 딱 그 선까지만 하는 것 같더라. 그런데 사랑이 커지려면 서로 그것보다 아주 조금씩 더 해주고 더 해주고 그래야지 그 크기가 커진다고 생각해, 나는. 그리고 나는 이제 우리가 곧 결혼 만 4년이 되니까 처음 가졌던 애정과는 조금 다른 애정 관계로 넘어가는 과도기라고 생각했어. 그 과정에서 자기는 먼저 나가 떨어진 거고."

"과도기라는, 내가 먼저 나가 떨어졌다는 네 말은 맞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니 이 사람은 결혼 뒤에 나보다도 더 에로스적인 사랑을 꿈꾸고 이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나는 내가 더 그런 줄로 착각했다. 왜냐하면 이것도 정말 비참한데 이 사람이 먼저 내 스킨십을 거부했으니까. 일찍이 나한테서 마음이 떠나고 내가 싫었던 거다.) 이 당시에는 몰랐는데 글로 정리하면서 마치 엄마에게 자신을 봐주지 않는다며, 삐쳐서 투정 부리는 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 또한 인정하고 싶지 않고 아니길 바라지만,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나는 결혼할 때 최소한 이 사람이 나 이외 상대와의 애정 문제로 나를 곤란하게 할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면 그런 최악의 상황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겠다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


실제로 이 사람이 처음에는 여러 이혼 사유를 들었지만, 내가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면서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이러다가 나 죽을 것 같다고 애원하는 상황에서, '자신은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변하기 힘들 거라고. 그래도 노력하고 싶냐'고 말했다. 결혼은 했으나 사랑이 식었으니 떠나겠다라...... (물론, 그런 나라들도 있지. 이탈리아나 미국은 이런 이유로도 이혼을 하는 경우도 많은 편이라고, 결혼관이나 가치관 측면에서 이혼에 좀 더 관대(?)하다고 들었다.)


나는 결혼생활에서 내가 이상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이야 말로 한없이 이상적이고 무책임하다. 이 사람은 종종 내가 가족과 결혼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우리 결혼의 불행을 내탓으로 넘겼는데(가스라이팅), 이 사람이야 말로 이런 이유로 결혼을 접자고 했으니 평생 연애만 하고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다. 철저한 이기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는 내가 아니라 영인 씨다. 그는 계속 나에게 너는 이기적이고 너밖에 모르고 사람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수많은 말 중에 귀담아 들을 수 없는 말이 많았기 때문에. 그나마 이해하고 들었는데도 돌이켜보니 너무 많아서 그랬었다. 이것도 추후에 더 다루려고 한다.) 이러러면 대체 넌 결혼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며 여러 번 지적했는데......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영인 씨였다.


"나는 관계에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적용해. 나에게 잘해주면 플러스, 그게 아니면 마이너스. 계속 마이너스를 하다가 0 아래로 떨어지면 관계를 끊는 거야."

"그럼 지금 나는 영인 씨에게 0 아래로 떨어진 관계인 거야? 그럼 영인 씨에게 평등한 관계는 뭔데?"

"서로 0인 관계지. 관계를 맺지 않았을 때. 그냥 모르는 사람. 난 그게 평등한 관계라고 생각해."


정말...... 기적의 논리였다. 이런 논리라면 사람이 관계를 맺고 가까워질수록 갈등도 많고 상처 입는 경우도 늘어나는데 그럼에도, 다시 풀고 회복하고 치유하고 그러면서 사는 건데, 이 사람 말에 따르면 자신이 상처를 받을 때마다 계속 관계에 마이너스를 주면, 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제야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아버지)이 왜 완전히 낯선 이들에게 그토록 나이스 하게 대하는지(타인에게 예의 갖춰 대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동기가 중요하다고 알게 되었다. 예의이고 규범이라서 당연하니까 이를 지키려고, 상대방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이 가족은 타인에게 자신이 '잘 보이려는' 의도일 확률이 높다), 왜 더 아껴야 할 가족들에게 오히려 말을 막 하거나(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막 대하는지, 왜 이 사람이 친구가 거의 없는지,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라고 해봐야 딱 한 명이다, 알 것 같았다. 결혼 당시에는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게 가정에 충실한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인간관계가 넓지 않아서 거의 집에 머무는데도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며 인생의 중심을 자신이 꾸린 가정과 아내에게 두지 않는 사람도 있다고 알게 되었다. 정말 기분 더럽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오히려 같이 있어서 외롭다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이 정말로 우리가 나눈 대화처럼 생각하는지, 생각은 나와 비슷한데 사용하는 어휘가 거칠고 표현을 엉성하게 한 건지는 모르겠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어떤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아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가 싫고 견딜 수 없고 현재 결혼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에둘러서 장황하게 표현하다 보니 말이 꼬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이 생각해도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털어놓으면 이상하게 보리라고 알고 있어서 꾹꾹 눌러 애써 감춰왔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사람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상황이 자신이 갑이고 내가 을이라서 자신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고, 잘 보여야 하는 내가 알아서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부부간에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규정하고 있다고 알게 되었다.


연애하는 3년 동안 대체 뭘 참았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든 말과 행동을 참고 견뎠다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라고 내 마음대로만 했으려고. 사랑하니까 좋아하니까 참는다는 게 고통스럽거나 참는다고 느끼지 않았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를 숨기거나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였기에, 그가 나를 다 포용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믿었다. 참는다는 건 고통스럽고 불편하잖아. 그럼,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지.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과 결혼을 했어야지. 그의 이런 모습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내가 무능력하고, 한편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결혼 전 3년 간 철저하게 감췄다는 사실에 문득 사람이 무서워졌다. 다른 생각은 다 집어치우고 우선은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자리잡았다.



1. 갈 데까지 간 관계

2. 그거…… 이혼하자는 말이야?

3. 그가 말한 이혼 사유

4. # 심리상담 1일 차


5. 시어머니를 만나다

6. 시어머니의 본심

7. 돌이켜보니 싸했던 순간들: 시어머니 편

8. # 심리상담 2일 차


9. 이혼을 받아들인 계기 (1)

10. 이혼을 받아들인 계기 (2)

11. 이혼 가정 자녀와 결혼해서 벌어진 일 (1)

12. 이혼 가정 자녀와 결혼해서 벌어진 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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