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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ug 09. 2022

굳게 믿었던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끼다

처음으로 자기혐오감과 자기부정에 시달리다

다음 날, 엄마에게 듣기로 나와 대화를 나눌 때 아버지는 여지없이 술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고. 평소 얼마나 술에 찌들어 살았는지 술 취한 모습이 익숙해서 이를 분간하지 못했다는 데 우선 충격을 받았다(관련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213). 자족하며 겸손하게 사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본심은 강남 테헤란로에 가 있을 만큼 성공을 향한 집착과 욕망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본색을 알게 된 충격은 더 커서 쉬이 가시질 않았다.


욕심이 너무 커서 도저히 그 끝이 잡히지 않을 지경인데, 현실의 자기 모습과 주변 상황은 욕심의 크기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도 못 할 텐데, 얼마나 억울하고 세상이 불공평할까. 자신이 가장 잘나야 하는데 세상에 넘치는 잘난 사람 틈바구니에서 늘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간헐적으로 폭발하는 분노감을 억누르고, 끝없는 자기혐오에 좀먹혀 산다. 뒤엉킬 대로 뒤엉킨 엉망인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눈 떠서 잠들 때까지 매일을 지옥 속에서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야말로 생각이 많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던 소소한 즐거움에 만족하며 자족하고 살던 아버지와 어젯밤 직면한 헛된 욕심에 사로잡힌 열등감으로 점철된 모순덩어리 아버지 사이는 너무 괴리가 컸다. 어른들이 다 그렇지, 세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딨으려고, 사람이니까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지,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 집값에는 누구나 민감할 수밖에 없지, 좋은 아파트나 강남에 얼마든지 살고 싶어 할 수 있지 – 라며 이게 뭐 별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믿었던 우직한 큰 산 같던 아버지의 배신이고 충격이었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존재가 너무 커서 여태껏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일구고, 긍정적으로(긍정적으로 보이게) 살아가는 아버지는 내 인생의 본보기이자 나침반이었다. 아버지를 향한 굳건한 믿음을 지녔기에, 내가 믿어온 아버지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곧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의 중심축이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늘 지나친 욕심은 부리지 말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자족하고, 일상을 이루는 촘촘하고 사소한 즐거움을 중시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내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위선자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지금껏 믿어온 가치가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거짓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아버지는 온갖 역경을 겉으로는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과거에 매여서 후회와 한으로 가득찬 삶을 살고 있었다. 사실 나도 욕심이 끝이 없는데 아버지처럼 욕망을 꾹꾹 누르며 나 자신을 기만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지금껏 옳다고 믿은 가치관에 강한 의심이 들고 마구 흔들렸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면 실은 나도 아버지처럼 열등감덩어리에 끝없는 자격지심에 휩싸여 살고 있지는 않은 지 불쑥 처음 느껴보는 강한 자기혐오감이 치솟았다.




욕실에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는데, 아버지를 닮은 내 얼굴이 갑자기 못 견디게 싫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입매, 오똑한 콧날, 전체적인 얼굴 윤곽…… 언뜻언뜻 비치는 아버지가 남긴 유전자의 흔적을 당장이라도 내 얼굴에 마구 스크래치를 내서 모조리 지우고 싶었다. 내가 직접 파낼 수 없다면 성형수술로 얼굴을 싹 갈아엎어서 아무도 내 얼굴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하고 싶었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내 외모에 만족하며 살고 있어서 단 한 번도 성형수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자기혐오감에 익숙한 얼굴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페이스오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자 ‘대체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야 하지?’라는 격한 불안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꺼이꺼이 소리 내서 목놓아 울었다.


이날 처음으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자기부정에 시달리면 도리가 없이 ‘생을 마감해야겠다’라는 생각에 이른다고 알게 되었다. 부모에게 애착이 강한 상태에서 어떤 이유로든 믿었던 부모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면, 그 유전자를 물려받은 부모와 내외면이 닮은 내 모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고 알게 되었다. 자기혐오에서 벗어나려면 부모와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하는데, 인간의 도리상 차마 부모를 죽일 수는 없으니 그럼, 방법은 부모와 같이 발 딛고 사는 이 세상을 내가 먼저 등지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해소가 잘 되지 않고 마음에 머물러 있어서 사춘기 아이들이 그토록 날이 서고 제멋대로 구는구나 싶었다. 제멋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살기 위한 격한 몸부림이구나 싶었다. 죽는 건 두렵고 말이 안 되기도 하니까 대신 머리를 쨍한 핑크색으로 물들였다가 반삭을 하기도 하고, 옷도 어디서 듣다 보도 못한 희한한 패션을 구사하고, 법과 범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일탈을 즐기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다 커버린 어른인데. 이제 와서 부모를 속상하게 할 작정으로 청개구리처럼 일탈이랍시고 가출을 해봐야 아무 의미가 없고. 누군가와 크게 싸우거나 편의점에서 자잘한 물건을 훔쳐봐야 선처를 기대할 수 없이 경찰서에서 오롯이 다 내 범죄 전과가 되어버리고. 공부를 등한시해서 성적이 뚝 떨어지기에는 더 받을 성적이 존재하지도 않고. 이상한 남자를 사귀자니 그건 내 인생이 아까워서 더는 싫었다. 사회에서 공인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이제 어떤 일탈을 하더라도 대부분 직접적인 내 손해로 바로 돌아와서 아무런 일탈을 시도조차 할 수도 없었다. 사춘기 때 부모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착하게만 살아온 게 뒤늦게 억울했지만, 이것이 어른의 세계에 이미 깊숙이 발을 들인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나도 나름은 보충 수업 빼먹고 몰래 만화책도 보고, 비 오는 날 미친 사람처럼 일부러 비 맞고 돌아다니고, 정문을 두고 괜히 학교 담도 넘고 소소한 일탈을 즐겼었는데, 이건 말 그대로 너무 소소했던 것 같다. 좀 더 내 마음대로 해서 부모님을 조금은 더 곤란하게 하고, 선생님도 조금은 더 곤란하게 하고, 야단도 좀 더 맞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항도 좀 더 했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나는 너무 모범생에 지나친 쫄보였다. 너무 일찍 철들어서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건 어지간하면 다 하지 않고 착하고 얌전한 십 대 시절을 보냈으니 말이다.




멋지고 긍정적으로 바라본 부모의 위선적인 면모를 자각한 뒤, 자기혐오와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쳐서 자기수용의 단계에 이른 구체적인 심리 변화를 기록했습니다.

사춘기 등 이미 이 과정을 거치신 분들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실 수 있고, 어른이지만 여전히 부모와의 애착관계에 매여있는 분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듯합니다.


글은 총 3개로 구성했습니다.


엄마가 25년 산 집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 그리고는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https://brunch.co.kr/@smilepearlll/250


굳게 믿었던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끼다 (현재 글)

 : 처음으로 자기혐오감과 자기부정에 시달리다

https://brunch.co.kr/@smilepearlll/251


불행을 벗어나 나 스스로 행복해지는 '선택'하기

 : 자기혐오감을 벗어나서 나 자신을 수용하기

https://brunch.co.kr/@smilepearlll/252



브런치북 <부모님과 관계를 끊기로 했습니다>를

심리에세이 <부모님과 헤어지는 중입니다> 책으로 출간습니다.


현재 온라인 서점(교보문고 온라인,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도서)에서 예약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책은 6월 22일(목) 발송 예정으로 예정일 이후 1~2일 이내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책 소개는 각 온라인 서점을 확인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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