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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묘한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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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멀스멀 Dec 09. 2021

그렇게 식구가 된다

고양이가 집에 온 첫날

 책장 밑으로 들어간 고양이를 기다리는 긴 밤이 지났다. 궁금해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꾹 붙들었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할 시간을 주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트에 다녀올 때도 행여 너무 놀랄까 발걸음도 조심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잠깐 졸다 일어나 밥도 먹고 고양이가 오기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다. 동동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조용히 하느라 조금 힘들었을 뿐.


 한나절쯤 지나자 우주의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새끼 고양이라서 가능한 짧은 시간이다. 책장 밑에서 나와 작은방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는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박스로 만들어준 숨숨집을 건드리는 소리 같이 작은 움직임들이 느껴졌다. 조금 열어둔 문틈으로 나오더니 부엌 지나 거실에 있는 우리를 신경 쓰면서도 탐색을 이어갔다. 하부장 아래 냄새도 맡고 한편에 딸린 창고도 들어갔다 나왔다. 싱크대와 화장실 앞에 각각 놓인 발매트엔 다양한 냄새가 배어있는지 유독 오랜 시간을 보내더니 그 위에서 식빵**을 구웠다. 두 명의 인간이 있는 거실까진 거리를 조금 남겨둔 채 잠시 쉬어가던 시간. 우리는 우주를 투명 고양이 취급했고, 우주는 우리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아깽이는 호기심을 연료 삼아 금세 탐험을 이어갔다. 조심스레 중문 문지방을 넘어 거실에 들어와선 한 땀 한 땀 정말이지 조심스럽고 집요하게 탐색했다. 자기 발이 닿는 집안 모든 구석을 살펴본 순간, 마치 게임에서 한 레벨을 클리어하고 다음 스테이지에 나아간 것처럼 깨발랄한 아깽이로 변신했다. 두 인간에게도 성큼성큼 다가와 장난을 치고, 제 방에 가서 밥도 열심히 먹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장난감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고양이가 집에 오기 전에 방 하나를 비우며 많은 것들을 정리했다. 고양이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위험한 것들을 치웠다. TV장 아래 같이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곳들도 청소하고 전선들을 정리했다. 옷장 옆 좁은 틈은 책장 아래와 달리 손이 닿지 않아 고양이가 들어가면 꺼낼 수 없었다. 고양이들은 몸이 아프거나 겁먹으면 깊숙이 숨기 때문에 이런 곳들도 미리미리 박스 등으로 막아뒀다.*** 나름 치울 만큼 치우고 고양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생각했다. 그러나 천방지축인 아깽이의 발이 닿는 모든 곳에 있는 건 그의 차지가 되었고 모든 것을 긁고 뜯고 씹어봤다. 스크래처****를 주면 그것만 긁는 게 아니라 스크래처도 긁고 이케아 암체어도 긁었다. 방석을 주면 방석에서도 발매트에서도 인간들이 쓰는 요나 이불, 베개에서도 식빵을 구웠다. 며칠 안에 캣타워도 들였지만 이미 책상도 의자도 캣타워가 되어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적응하고 많은 것들이 고양이와 공유됐다.


모든 물건들이 새로운 쓰임을 갖는다


 거실 탐색을 모두 마치고 우리와 장난을 주고받던 즈음 아깽이가 첫 번째 실수를 했다. 사람 화장실 앞 발매트에 올라가 이리저리 돌며 자리를 살피더니 갑자기 똥을 싼 것이다. (하...) 마룻바닥이 아닌 폭신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발매트에 싼 똥을 앞발로 정성스럽게 덮어놓는 시늉까지 했다. 모래가 없으니 덮일 리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고양이 화장실 안에 똥을 넣어두고 매트는 바로 새것으로 갈았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아깽이는 또 신나서 돌아다니다 새 발매트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는데... 딱 봐도 다시 사고를 칠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를 잡고 똥을 싸려는 찰나 내가 발매트를 싹 치우자 마룻바닥에 볼일을 봤다. 돌아서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에 앞발을 허우적거리며 있지도 않은 모래를 덮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한바탕 웃었다. 다행히 이 두 번으로 실수는 끝이 났고 그다음부터는 자기 화장실을 사용했다.


 우주는 걱정보다 빠르게 적응했는데 정작 인간들이 적응하는 데 오래 걸렸다. 고양이, 그중에서도 아깽이와 함께 사는 데는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든다. 제때 밥과 물을 주고 화장실 청소를 해주는 건 아주 작은 부분이다. 무엇보다 힘든 건 어린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린 고양이는 호기심과 에너지가 넘친다는 것.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는 느낌으로 하루를 몇 개로 쪼개 지칠 때까지 놀고 지쳐 잠들었다가 순식간에 회복해서는 미친 듯이 달린다. 가족을 이루고 우두머리를 따르는 개와 비교해 고양이는 독립적인 동물이라고 말하고들 한다. 이건 상대적인 습성을 표현하는 말이지 고양이가 완벽하게 홀로 생활한다는 뜻이 아니다. 더욱이 어릴 때는 더 심해서 혼자 뛰어노는 것으로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자는 사람을 깨우고 바쁜 사람에게 장난을 건다. 도대체 몇 시간을 놀아줘야 하루가 끝나는지 모를 지경으로 공을 던지고 낚싯대를 휘두르고 쥐돌이를 흔들었다. 역시나 사람 아이와 마찬가지로 꽤 똑똑해서 대충 놀아주는 건 귀신같이 안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곤충이나 쥐가 된 기분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해야 한다.


암체어도, 책상 의자도 모두 고양이가 차지했다


 첫날부터 엄청나게 기 빨리는 날들이 시작된 와중에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길에서 만나 우리가 붙여줬던 우주라는 이름이 도저히 우리 입에 붙지 않았다.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길 바라며 좋은 뜻을 담아 붙여줬지만 크게 고민해서 지은 이름도 아니었다. 애청하던 TV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귀여운 아이의 이름이 우주인 것도 왠지 우리의 작명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 게 아니었지만 대충 따라 붙인듯한 느낌이랄까. 앞으로 10여 년 이상 우리와 함께할 고양이의 이름이니 이왕이면 입에 잘 붙는 이름으로 다시 붙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우주는 집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고 본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리 만무하며 '우주'라는 말이 어떤 신호로 인식되기도 전이었으므로 개명은 빠를수록 좋을 터였다.


 몇몇 후보를 거쳐 우리가 새로 붙여준 이름은 '쏘이'다. 길에서 보고 블랙홀을 닮았다고 생각한 검은 무늬는 밝은 집안에서 보니 검은콩 같아 보이기도 했다. 영어로 콩을 뜻하는 soy의 음차이자 라오스어, 태국어에서 골목길을 뜻하는 soi*****의 음차이다. 등에 있는 검은콩 모양의 생김과 길에서 온 출신 모두를 담은 뜻인데 발음이 귀엽기도 했다. 고양이는 높은음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모음의 차이를 더 잘 인지한다고 하니 그런 면에서도 좋은 작명 같았다. 이름을 붙여주는 김에 성도 붙여줬다. 반려인의 성을 반려동물에게 붙여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처음 만난 장소인 '고깃집'에서 따왔다. 그렇게 고깃집 데크 밑에 살던 작은 고양이는 우리집에 와서 고쏘이가 되었다.


쏘이




* 고양이가 처음 집에 왔을 땐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게 좋다. 독립된 공간에 화장실과 밥, 물, 스크래쳐, 숨숨집 등 기본적인 물건을 두고 조용하고 어두운 환경을 조성한다. 가끔씩 밥그릇과 화장실을 확인하는 정도 외에는 자극하지 않는다. 급한 마음에 자꾸 부르거나 숨어있는 고양이를 꺼내면 오히려 적응에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 '식빵'은 고양이가 앞발을 모으고 웅크린 자세를 뜻한다. 마치 식빵 덩어리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편안하게 쉬는 상태다. 단, 비슷한 모양에서 귀와 수염을 붙이고 있다면 잔뜩 겁먹은 상태로 자극하지 않는 게 좋다.


*** 머리 위가 천장처럼 돼있는 구조에 안정감을 느끼는 특성상 좁은 곳에 잘 숨는다. 유연해서 머리만 들어가면 웬만한 좁은 틈은 다 통과할 수 있는데 아깽이들은 가끔 기상천외한 곳에 들어가기도 한다. 고양이 관련 커뮤니티에서 본 사례 중 에어컨, 안마의자, 싱크대 하부장 뒷공간, 옷장, 서랍, 세탁기 등 다양한 경우가 있다. 몸이 아파 손 닿지 않는 곳에 숨게 되면 곤란하고 자칫 좁은 곳에 끼어 다칠 수 있으니 좁은 곳은 미리 막아두는 게 좋다. 임시로 막는 경우 박스 등을 활용하고 네트망, 아크릴판 등으로 막을 수 있다.


**** '스크래처'는 고양이가 발톱을 갈 수 있는 물건을 뜻한다. 골판지로 제작된 제품이 가장 흔하며 카펫, 로프 등 다양한 재질이 있다. 크게 수직형과 수평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양이마다 선호하는 형태와 재질이 다르므로 여러 가지 선택지를 제공하는 게 좋다. 발톱을 갈아 투명한 초승달 모양의 오래된 껍질이 주변에 떨어진다. 발톱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냄새를 남기며 스트레스 해소와 기분 좋음의 표출이기도 하다. 잠에서 깬 후, 식사 후에 많이 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자주 하므로 하루에 족히 수십 번은 볼 수 있다. 고양이가 주로 생활하는 공간 곳곳에 두는 것을 추천한다.


***** 'ຊອຍ' soi는 라오스어와 태국어에서 골목길을 뜻하는데 영문 표기를 읽으면 쏘이 같지만 원 발음은 '써이'에 가깝다.


매거진 '묘한 묘연'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으시면 이해하기 편한 연재 글입니다.

01화. 집사 간택의 순간 - 어느 날 새끼 고양이가 현관에 들어왔다

02화. 갑자기 고양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 아는 만큼 보인다고

03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고양이 - 천진하게,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04화. 마루 밑 고양이에서 책장 밑 고양이로 - 묘생 역전의 시작

05화. 그렇게 식구가 된다 - 고양이가 집에 온 첫날

06화. 고양이와 이사하기 1 - 웬만하면 추천하지 않는다

07화. 고양이와 이사하기 2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08화. 20평짜리 캣타워를 만들어보자 - 고양이가 사는 집 인테리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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