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108

Specialty Coffee

< 라흐마니노프_피아노 협주곡 제2번 >에 붙여진 짧은 글.

by 화몽

오전 10시 30분. 머리 위로 숨 가쁘게 올르던 햇살이 묵직이 내려앉은 커피숍의 유리문이 제법 무거웠다. 걷는 내내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던 다크 초콜릿 색을 머금은 나무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오늘의 디저트를 정리하던 그가 나를 봤다. 그는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런 그를 나는 느꼈다. 아니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사람을 향해 곧게 서있다는 것. 상대방의 시선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 내민 손에 담겨있는 마음을 의심치 않는 것 등은 내게 너무나 어려웠다. 적어도 나에게는 힘겨웠다. 그랬던 내가 그만은 피하지 않았다. 새하얀 컨버스 운동화로 오솔길과 닿아있는 커피숍 문턱을 넘었다. 한차례 빗줄기가 지나간 산책로가 이어지는듯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의 테이블들이 있었다. 내방보다 한 발짝 정도 너른 이 커피숍. 동그란 테이블마다 2-3개의 베어진 나무 밑동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생김은 나무를 닮아있지만 숨이라고는 단 한 줌도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살아있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하늘빛의 페인트로 무심히 칠해진 두 곳의 벽을 제외하고는 커다란 유리들이 이 곳을 지탱해주었다. 그 유리를 넘어오면 모든 것이 생기를 잃어버리는 듯했다. 반대쪽 모서리에 커다란 뱅갈 고무나무가 하나 있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잎조차 사진 속에 담겨있는 듯했다. 내 앞에 있음이 믿기지 않아 손톱으로 꼭 눌러보았다. 촉감으로 느껴짐은 생의 순간이지만 그 이상의 감각은 죽어있었다.


손님은 나뿐이었다. 몇 개의 선으로 그려진 이곳에서 그에게서만 숲의 내음이 났다. 오래전 아빠의 손을 잡고 걸었던 뒷산의 흙에서 피어오르던 향이 느껴졌다. 묘한 바람이 그로부터 불어온다. 하루의 대부분을 이 곳에서 커피를 만지작거리는 그에게서 난. 왜 해가 오렌지빛으로 번져가던 어린 시절의 흙길이 겹쳐 보이는 걸까? 아빠는 내 손을 잡아 앞으로 한 없이 끌어당겼다. 하늘과 땅의 색이 하나가 될 때쯤 아빠와 나는 집에 돌아왔다. 며칠 동안 내린 비 때문에 사방은 흠뻑 젖어있었고, 나는 비의 향을 그대로 묻혀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을 향해 늘어져 있는 긴 복도를 걷는 걸음마다 그 내음이 났다. 복도 끝에는 비가 만들어놓은 웅덩이가 아직 남아 있었다. 아빠가 열쇠를 돌려 문을 여는 동안 내 모습을 비추어봤다. 나는 웃어보았다. 그 안에 내가 아닌 내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나를 따라 웃지 않았다. 집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엄마가 그랬듯. 울고 있었다.


대학에 자퇴서를 던지고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몰랐다. 알싸하게 코끝을 감싸던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달아오르는 2월 말. 도저히 계속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나의 선택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학창 시절 엄마에게 나는 인생의 보증수표였다. 여고 동창생들 사이에서 엄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감색 슈트 차림의 대기업 임원인 아빠까지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엄마의 바람대로 나는 항상 맨 앞에 섰다. 모든 사람들은 나만 보는듯했다. 아니었다. 내가 아니었다. 내가 가려는 학교, 그곳에서 나의 좌표와 결과가 가리키는 방향만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미소 이번에도 전교 일등인가요?’ ‘미소는 알아서도 잘해요. 그 어려운 학교에서도..’ ‘미소 엄마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네. 어떻게 그렇게 착해요?' 어른들의 미묘한 웃음 속에 나는 외줄 타기를 했다. 좌표 위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불안하고 두려웠다. 좌표는 시시각각 무섭게 움직였고,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합격을 했고 흰색 가운을 입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 여겼다.


커피를 내리는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거의 매일 지나던 이곳, 항상 짙은 남색의 앞치마를 두르고 고요히 움직이는 그는 내게 하루의 한 조각이었다. 그래 그날이었다. 눈물마저 다 마른 그 날, 걷다 지친 내 앞에 그가 보였다. 넘어가는 해가 카페 안에 기다랗게 드리워져있었다. 그 절반쯤에 그가 서 있었다. 드리퍼에 커피를 내리려 하고 있었다. 문득 그 향이 그리워 견딜 수 없었다. 잔향이라도 내 것으로 하고 싶었다. 이것만이라도 욕심내고 싶었다. 이 세상에 나의 흔적이라고는 더 이상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들어선 카페 안에서 익숙한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엄마가 자주 듣던 곡이었다. 그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무엇인가에 홀린 듯 커피를 내리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피아노 선율을 내리고 있었다. 하얗고 검은건반들을 미끄러지듯 두드리며 드리퍼 위로 동그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커피에 향을 피웠다. 긴 주전자 입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뜨거운 물이 봄의 따사로움을 데리고 왔다. 검붉은색 꽃잎들이 투명한 서버 안으로 말려들어갔지만 오히려 향기는 밖으로 펼쳐나갔다.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다른 한 손도 연주 중이었다. 조심히 까닥거리며 들판의 바람을 가져왔다. 당장이라고 꽃을 피어오르게 만들 것 같은 따사로움이 그의 커피 안에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져 차올랐다.


"이 커피, 지금 내리시는 이... 커피 제가 마시면 안 될까요?"

"네? 손님. 이 커피는 다른 분이 주문하신 커피예요. 같은 것으로 내려드릴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뇨, 전 이 커피를 마시고 싶어요. 다음 내리시는 커피는 의미가 없어요. 제... "


세상에,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온 무엇인지도 모를 감정을 그에게서 느껴버렸다. 지금의 나를 대신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화산이 터져버린 듯한 황홀감에 나는 미친 듯 웃고 싶었지만 눈물만 흘렀다. 어린 시절 물구덩이 속에서 한없이 울고 있던 그 꼬마가 여기 서있었다. 그에게 당장 이 말을 전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커피 제 것으로 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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