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주 어릴 때 아빠한테 덧셈 문제를 물어본 적이 있다.
이것도 모르냐 꾸중을 들을까 봐 엄청 긴장해서 물어봤던 기억이 나지만 아빠한테는 그냥 작고 어린 첫째 딸의 수많은 질문 중 하나였을 것이다.
7살짜리 여자애는 옥색 책상 밑에 들어가 오른쪽 구석에 연필로 쓴다.
'오늘 아빠가 모르는 수학문제를 알려줬다.'
어설픈 완벽주의는 늘 내 삶을 방해해 왔다.
뭐든지 빨리 해내고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포기도 빨라지고 도전정신도 사라진 지 오래다.
자신감 자존감 성취감 그런 단어들은 나랑 거리가 멀었다.
아주 멀었다.
서점에 가면 평생 다 읽지도 못할 만큼의 성공기, 극복기들이 빼곡히 박혀있다.
이 사람들은 뭔데 다들 이렇게 잘났대?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어?
평생 책 읽기를 좋아해 왔지만 실패담 같은 건 읽어본 적이 없었다.
모든 동화도 소설도 해피엔딩이었다.
내가 아는 새드엔딩은 mp3에 넣어 읽던 인터넷 소설 '온새미로' 뿐이다.
서점에만 가면 실패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런 뭣 같은 세계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성공한 위인들이 줄지어있는 책장 앞에서 주제도 모르고 꼿꼿하게 서있는 멍청한 애가 바로 나다.
누가 어떤 실패의 고통을 얼마나 겪었는가 이딴 건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남의 불행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길 가다 만난 집 없는 동물들은 불쌍해죽겠지만 말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분명 세상이라는 건 9할의 실패와 1할의 성공으로 구성된 것일 텐데도 성공을 낳지 못한 실패들은 호적에서 다 파인다.
불행하게도 나는 자꾸 실패만 하는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작은 실패에도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무가치감만 남았다.
고작 23살의 나이 때 난 실패한 인생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내 인생이 완전히 망했으며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감은 완전히 0에 수렴하는 상태가 되어서 밖을 나가기도 어려웠다. 밖을 나가도 땅에 얼굴을 박고 다니고 있었다. 아무런 욕구가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고, 기억력이 너무 나빠졌다. 책에서 같은 문장을 수십 번 읽느라 진도가 안 나가고, 단칸방에서 밥도 먹지 않고 시체처럼 누워만 지내는 날들이 계속 됐다.
몇 년째 달고 살던 불면증이 몹시 심해졌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오늘이 어제인지 작년이 오늘인지 날짜감각도 시간감각도 다 사라졌다. 마침 사망기사를 자주 접했는데 죽는 게 의외로 쉬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저 깊은 어딘가에 푹 가라앉아서 혼자 웅크리고 떨고 있는 기분이랄까.
삶에 미련이 없어졌다.
손등에 2-3cm 남짓한 스크래치를 내고 나서야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폰으로 할 수 있는 우울증 테스트 같은 건 다 해본 것 같다. 테스트 결과에서 마지막 문장은 다 똑같았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자살고위험군"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으세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대체 내가 누구인지 지금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알고 싶었다. 이게 병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치료하면 되니까. 내가 이상한 인간이 아니라 그냥 어떤 병에 걸렸을 뿐이고 치료하면 나을 거란 말을 듣고 싶어서 정신과를 가기로 했다.
누가 내 상태에 대해 딱 떨어지는 정의를 해줬으면 했다. 아니면 평생 정신의학 서적만 끌어안고 돌팔이 짓이나 해댔을 게 분명했다.
그때만 해도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은 하트모양의 자물쇠가 달린 다이어리에나 쓰는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저 멀리 언덕 위에 덩그러니 있을 줄 알았던 정신병원은 우리 집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었다.
으스스하게 거미줄이 잔뜩 쳐진 병원 데스크에 전화벨만 울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전화를 걸어봤다.
.
.
.
"네 ○○정신과입니다~"
어라, 받는다.
지금 가도 되냐고 물어보고 끊은 뒤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서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썼다.
장사 안 되는 소아과 같아 보이는 작은 개인 정신과였다. 인터넷에서 이미 다 본 듯한 구면인 질문들을 포함해 여러 검사를 했다.
[스트레스 수치 100, 일상생활불가능 100, 신체화증상 100 …]
그냥 모든 수치가 꼭대기를 찍고 있는 지표가 그려진 결과지를 받아 들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왜 우울한 것 같으세요?"
'그걸 네가 모르면 내가 어떻게 알아'(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잘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차라리 LA 아울렛에서 May I help you?라고 해주는 말이 더 듣기 좋을 뻔했다.
난 원인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콕 집어 말하기엔 정신과 진료가 퍽 낯설었다. 생판 처음 보는 면전에 대고 절친도 모르는 내 치부를 알려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자해 상처를 보여줬다. 고개도 못 들고 눈도 못 마주치면서 말했지만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 그리고 실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먹지도 않을 약을 타오고 그때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병원을 안 갔다.
네이버에 우울증 원인이라고 검색하면 자주 보이던
그놈의 생물학적 원인, 환경적 요인, 유전적 요인 어쩌고 저쩌고를 모두 짬뽕한 걸 내가 갖고 있었다.
자각하지 못했었는데 학창 시절 대부분이 왕따와 따돌림으로 범벅되어 있었던 나는 어릴 때부터 죽어버릴까 하고 살기 싫어했었다. 학교와 학원에서의 교우관계에 지쳐 살아도 우리 가족은 모두가 지쳐 살고 있었기에 집은 나를 조금도 치유해주지 못했다.
짧은 생이지만 평생이 내가 필연적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완전체가 바로 나였다.
우울증은 원인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원인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우울증이 압도적으로 많을 거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원인 없는 우울증은 없다.
내 조상이 이순신 장군이어도 정말 운 나쁘게 우연히 내가 우울증인 팔자로 태어났다면? 그 또한 이유라면 이유인 셈이다.
우울증 환자를 대상으로 <우울증의 원인>이라면서 직장 내 괴롭힘/진로취업문제/돈문제/연인 간의 폭력/교우관계/불우한 가정환경/불우한 학창 시절/개인적인 complex/특정한 사건과 경험 등등 굳이 통계를 낼 수는 있겠다. 아마 환자 100명이 있으면 이유는 300개가 넘을 것이다. 일단 나만해도 위에 언급한 대표적인 원인 사항들을 모조리 갖고 있다.
남들도 다 힘들게 산다, 그러면서 성장한다 말하며 한계를 넘어서고 성공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나는 영원히 나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성장하는 사람들은 내가 갖지 못한 구원의 존재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며 말도 안 되는 시기심만 품은 채 계절 하나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