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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기 Jun 27. 2024

벤처기업인  K

결정을 미루면 독이 된다

K는 직장생활 1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대학에선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회사를 다닌 지 5년 만에 결혼했다. K의 아내는 둘째를 낳을 때 휴직한 후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K가 창업할 때는 아이가 둘이었고, 신도시에 자기 명의로 아파트를 장만한 뒤였다. K의 아내는 남편의 창업이 걱정됐지만, 정부 지원사업에 선정되고, 소액이지만 외부 투자를 받는 등 활발하게 뭔가 이루어지고 있는 걸 보고 비로소 근심이 줄었다고 했다.


K의 창업 아이템은 이른바 '푸드테크'인데, 유사한 경쟁업체가 몇 개 있었지만 좋은 신선식품을 직접 소싱해 배송하면 승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창업 후에는 푸드테크 업체들이 입주해 있는 서울시 먹거리창업지원센터에도 입주했었고, 가락동과 노량진을 오가며 일을 했다.


K의 사업은 코로나로 인해 주문배달이 늘었을 때 잠깐 매출이 늘어났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장 큰 타격은 유사 경쟁업체가 큰 투자를 받고 난 후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경쟁업체의 연매출은 순식간에 100억을 넘어섰지만, K의 월매출은 여전히 5천만 원을 넘지 못한 채 오히려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가는 비용은 똑같은데 매출이 줄면서 적자가 커지자 방법을 찾아야 했다. K는 가공식품을 만들기로 했다. 제조가능한 가공 식품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제조업체를 찾아 미팅하는 동안 시간이 또 흘렀다. 그러는 동안 코로나가 끝나가고 있었고, K의 매출은 더 줄어들었다. 투자받은 약간의 돈과 살던 집을 담보로 융통한 자금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K는 파트너이자 거래처인 업체 사장과 협의해 사업 운영을 맡기고, 가족과 함께 식품가공을 수 있는 지방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생활비와 사업을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K가 나를 찾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사업 초창기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상황을 대략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내용을 정확히 들어보니 심각한 상태였다.


나는 K에게 조언했다.

사업을 정리해서 빚을 줄이고, 다시 취업해 일하면서 기회를 엿봐라. 그러면 집은 건질 수 있을 거다. 집은 너나 와이프, 그리고 애들한테는 마지막 보루 같은 거다.

그리고 변호사 연락처도 건네주었다.


K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지만, 변호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고, 내게도 연락이 없었다. K가 만들어 팔려는 상품의 시제품을 갖고 음식 관련 전시행사에 참가한다는 걸 메시지로 알려왔을 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전시장을 찾았는데, K는 내게 냉랭한 태도를 취했다. 메시지는 그의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 목록 전체에게 뿌린 것이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전시장을 나오는데,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후 K와는 한참 동안 연락이 끊겼다.

K가 나에게 다시 연락한 건, 1년이 훨씬 지난 후였다. K는 나를 찾아와 법인파산과 개인회생에 대해 자세히 물어봤고, 나는 내가 했던 법인파산과 개인회생 과정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었다. K는 내게 화가 났었다고 말했다. 자기는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법인파산과 개인회생을 하라고 하니 속상하고 화가 많이 났었다고 했다.

다음날 K는 내가 소개해준 변호사를 만났다.


K는 법인파산 절차를 마무리지었고, 개인회생이 진행 중이다.

K는 변호사를 만난 이후 내게 여러 차례 전화 연락을 했고, 두 번은 사무실로 찾아왔었는데, 전화를 할 때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올 때마다 같은 얘기를 했다.


대표님이 처음 정리하라고 했을 때 말을 들었으면 집은 건졌을 텐데, 한 2년 동안 집도 날아가고 다 잃었어요. 그때 그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최근에 만난 K는 준비 중이던 아이템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울증인지 뭔지 멍한 상태로 1년가량을 보낸 거 같다고도 했다. 아내가 병원을 가보라고 한다고도 말했다. 더 내다 팔 것도 없고, 해약할 통장도 없으니 돈을 벌어오라는 아내의 하소연, 취업을 한 후 지금 준비하는 게 뭔가 진행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나는 K에게 단호하게 얘기했다.

멍한 상태로 보낸 건 당연한 거니 자책하지 마라. 나도 그랬다. 큰 일을 겪었는데 몇 명이나 평소처럼 웃고 떠들고 활기차게 일을 추진하겠냐.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하면 된다. 취업을 해라.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 누가 와서 일하라고 하면 얼른 달려가서 고맙습니다 하고 말 안 바뀌게 다음 날부터 바로 일 시작해라. 취업해서 일하다가 준비 다돼서 기회가 왔다 싶으면 그때 가서 그거 해라. 지금 아니면 안 될 거 같은 그 생각, 그거 틀린 거더라.

 


정리되면 연락하겠다던 K는 여태 소식이 없다. 아직 긴 고민 중인지, 아니면 벌써 일을 시작해서 바쁜 건지. 그가 어떤 결정을 하던 타이밍을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도 K도 이미 타이밍을 놓친 적이 있다.

고민만 하면서 내일 내일 했을 때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나쁜 결정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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