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자라지 못한 나에게.

by 딥페이지

내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는 지금 31살이다. 그리고 직업은... 딱히 없다.

어쩌면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도 직업이 될 수 있을까. 내 현실의 나이는 분명 31살이지만,

내 마음속의 나는 아직 8살 어딘가에 멈춰 있는 것 같다.

띠를 두 번 돌아도 닿지 않는 마음의 나이. 그 8살의 나에게는 늘 미안함이 많다.


추석을 닷새 남긴 어느 날, 나는 한 선택의 기점에 서 있었다.

아니, 선택이라기보다 방향이 정해진 흐름 속에 따라가야 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건 친엄마가 아닌 새엄마와의 새로운 삶이었고, 그 낯선 삶은 눈 뜨자마자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익숙한 공간은 사라졌고, 아이들은 나를 '촌놈'이라 불렀다.

친해지고 싶었다.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가갈수록 친해지고 싶을수록 멀어졌다.

아마 나는 그때부터 혼자였나 보다.


외로웠다. 그리웠다. 안아주던 품, 웃어주던 얼굴, 함께 웃던 소리들. 점점 나의 바운더리는 작아졌고,

나는 스스로를 점점 더 좁은 세계로 밀어넣었다.

학교는 학문도 배우는 곳이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건 사람을 배우는 곳일지도 모른다.

나는 6년 동안 15번의 이사를 했고, 학문도 사회성도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다음 학교로 옮겨 다녔다.


어떻게 친해지는 건지, 어떻게 해야 ‘가정교육이 잘된 아이’가 되는 건지 나는 몰랐다.

나는 그냥 게임을 좋아하던 해맑은 초등학교 1학년 아이였을 뿐이다.

어떤 날은 학교에서 불우이웃을 위한 기부 모금이 있던 날, 나는 그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대로 기부모금의 대한 내용을 전했다. 부모의 입장은 '강요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분노였고,

선생님의 입장은 '아이의 인성교육에 좀 더 신경을 써달라'는 담임으로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답변이었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조용한 욕받이가 되었다.


또 어떤 날은, 영어시간이었다. Sit down, please. 그때 나는 ‘please’를 빼먹었고, 선생님은 그걸로

나를 크게 꾸짖었다. “마음대로 영어를 한다”며 나는 혼이 났고, 그건 나에게 큰 공포로 남았다.

나와 같은 아이들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르쳐주는 대신, 화를 내는 어른들 사이에서

우리는 스스로 자라야 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나는 칭찬이 고팠다. 사랑이 고팠고, 안아줄 품이 그리웠다.

혼이 난 이후엔 “사랑해서 그런 거야”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훈육은 있었지만, 이해는 없었다.

허그도, 포용도, 따뜻한 말도 없이 나는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살아왔다.

양육이란 이름으로 덮기엔 너무 길었던 방임의 시간. 가족에게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배우지 못한 게

너무 많았다. 친구를 사귀는 법, 예쁘게 말하는 법,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법. 나는 아직도 모른다.

아직도 모른다기보다는 확실히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저 눈치만 늘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너희는 내가 있어서 이만큼 자란 거야.”

아니, 절대요. 우리는 당신 없이, 우리끼리 자라려고 안간힘을 썼던 거예요.

배고팠지만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입고 싶었지만 교복으로 버텼고, 씻고 싶었지만 보일러가 고장나 따뜻한 물조차 나오지 않아서 커피포트에 물 끓여가며 안간힘을 쓴거라고. 더럽다고 냄새난다고 욕 먹어도 할 수 없었다. 우리 집 보일러가 고장나서 어쩔 수 없었다고. 누가 믿겠어. 집 보일러가 고장났다고 하는 걸.


그 시절, 나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유난히도 고되었고, 어른들은

너무 쉽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너무 쉽다는 듯 말 한마디도 툭툭 내뱉고는 했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죽고싶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어린 나에게 한 마디 할 여유가 있다.

너무 늦었지만 들어주기를.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그때의 네가 이렇게 살아 있어줘서 지금의 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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