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조례를 다녀온 내게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우리 반 학부모님이었다. 나는 그 통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를 책망하거나, 따지는 전화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쩌랴, 제대로 상황을 잘 설명하면 그만인 것을.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전화기를 들었다.
"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담임선생님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통화요청 해주셔서 전화드렸습니다."
-네, 선생님 바쁘신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요즘 교실 분위기가 조금 어수선하다는 얘기가 있는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늘 노고가 많으신 줄 아는데,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아, 어머님 그러시군요 뭔가 걱정되시는 부분이 있으신가 봐요"
-뭐 어떤 사건이 있거나 한건 아닙니다. 저, 예.. 그 교생선생님은 언제 가시나요? 아이들이 들떠서 수업도 집중이 잘 안 되고, 또 반에 힘 있는 친구들이 교생선생님이 계실 때는 반 분위기를 흐린다는 얘기도 있어서..
생각보다 솔직하고 직접적인 학부모님의 말씀에 나는 마음이 살짝 덜컥 내려앉았다. 의외로 어제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최근 반 분위기와 교실 전반에 대한 민원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학부모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선생님,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교생 선생님이 수업하신 부분은 선생님께서 다시 정리 안 해주신다는 말이 돌던데 설마 그건 아니겠지요? 시험에 나오고 당장 수능에도 칠 과목인데 그렇진 않으시겠지요?
통화가 길어지다 보니 어머님의 목소리에서 다소 흥분한 기운이 느껴졌다. 격앙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오해가 없이 내 생각을 잘 전달해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최대한 친절한 태도로 응답했다.
"어머님, 가르치지 않은 부분을 시험에 출제하진 않습니다. 해당 내용은 핵심을 중심으로 제가 복습지도 후 다음 차시 진도를 나갈 예정이니 그 부분은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그렇군요
다소 누그러진 학부모님의 기세에 나는 조금 안도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학부모님께 조금 이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교생 선생님께서는 지난 3년간 대학에서 충분한 소양을 갖춘 분이시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려 최선을 다해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남은 기간 동안은 제가 더욱 반에 신경 쓰고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으니 학부모님께도 조금은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3초 정도 짧은 적막이 이어졌다. 나는 고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해 손 끝으로 볼펜의 팁을 토각거리며 눌렀다. 내가 다시 입을 떼려던 그 순간, 학부모님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셨다.
-아 예.. 선생님 마음 쓰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한 노파심일 수도 있는데, 아이가 근심하고 스트레스받는 모습을 보니 저도 걱정이 많이 되어서 그랬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도 학생들을 일깨워 주시려고 노력하신다는 점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여하튼 노고가 많으십니다. 바쁘신데 통화가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이만 끊어도 괜찮으실지요?
"네, 궁금하시거나 요청하실 만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전화 주십시오, 학부모님"
통화를 마치고 나는 마음속 긴장의 끈이 놓이는 기분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머릿속으론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학생들은 학생들의 입장, 학부모님은 학부모님의 입장, 교사는 교사의 입장이 있다. 각자의 입장과 생각이 있으므로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태도는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사실, 이걸 조율하는 것이 교사의 입장에선 가장 힘든 일이기도 했다.
나는 이마에 난 식은땀을 훔치고 교무실 책상 위의 달력을 바라봤다. 내일은 체육대회 날이었다. 단합을 위해 조성된 날을 하루 앞두고, 구성원들의 마음이 조각난 반을 돌아보는 건 조금 속이 쓰렸다. 그러나 그런들 어쩌랴. 이 또한 우리였다. 내가 체육대회라고 동그라미 처진 내일 날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 순간, 학생회 학생 한 명이 나를 불렀다.
"선생님, 바쁘세요?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이 학생은 언제부터 내 곁에 서있었던 걸까.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학생이 메모지 하나를 꺼내 들고 내게 한걸음 더 바짝 다가왔다.
"내일 학년별 계주 릴레이를 하는데요, 원래 뛰기로 하셨던 선생님 한 분이 못 뛰게 되셔서요.. 혹시 대신 뛰어주실 수 있으실까요? 선생님 바로 앞 주자가 선생님 반 학생이에요!!"
달리기라니.. 백 미터 평균 20초인 내가?!
나는 학생들의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주려 노력하지만 달리기 만큼은 아니었다. 나 때문에 우리 학년이 진다면 그만큼 실망과 민폐도 없으리라. 내가 그게.. 하며 어렵게 말을 꺼내자 학생이 잔뜩 슬픈 눈으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선생님 반 학생이 뛰고 선생님이 뛰시고, 마지막은 선생님 반 교생선생님이 뛰게 될 거예요. 그 반 친구들은 얼마나 기대되고 좋을까요, 꼭 안 이겨도 돼요, 같이 하는데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맙소사, 같이 하는데 의미가 있다니. 이번엔 그녀의 논리에 내가 졌다. 나는 계주 멤버에 이름을 올리는 걸 허락하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반 계주 대표가 교생선생님을 무시하던 그 무리들 중 하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묘하게 웃음이 났다. 어찌 되었건 진하게 엮여보라는 신의 계시구나 싶었다. 때마침, 그 학생이 내게 찾아왔다.
"저 선생님.. 있다가 교생선생님이랑, 담임 선생님이랑 저 이렇게 해서 점심시간에 한번 회의도 해보고 모의로 바통터치 하는 것도 연습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혹시 시간 되시면요, 괜찮으실까요."
녀석은 묘하게 주눅이 들어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웃음이 났다. 그래 너희도 눈치란게 있는 거겠지. 그리고 그제야 저 아이가 체육특기생이라는 것이 기억났다.어쩌겠는가 미운 구석이 있어도 이 또한 내게 온 학생이다. 나는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점심을 빨리 먹고 운동장 한편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
"선생님 100미터 몇 초에 뛰세요? 일단 전, 14초요!!"
학생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나는 나답지 않게 주눅이 들었다. 나는 나름 전성기?! 였던 여고생 때 최고 기록이 18초였다. 마지막으로 잰 기억도 10년은 됐으나 거의 20초에 육박했다. 나는 대답을 않고 옆의 교생 선생님을 쳐다봤다. 교생선생님은 빙긋 웃고 있었다.
"내가 원래 전공이 체육교육인 건 아니?!"
아, 그녀는 복수전공으로 교생실습을 나왔다고 했는데 본래 체육교육과 학생인 건 나 역시 학기 초에만 인식하고 한동안 잠시 잊고 있었다. 학생은 아예 금시초문인 듯 놀라며 되물었다.
"체육선생님이셨어요 원래???"
"응, 육상선수였어."
세상에나 이럴 수가. 교생 선생님이 그만큼 당당한 태도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학생은 종종거리며 기뻐하곤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100미터 최고 기록이 어떻게 되세요?"
"12초 3"
와..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나보다 두 배는 족히 빠르구나.. 일단, 나는 안도했다. 조금 못 뛰어도 앞뒤로 워낙 잘 뛰니 커버가 되겠거니 싶었다. 무임승차자를 극도로 싫어하는 나이지만, 이번엔 어쩔 수 없다. 무능력자인 것을 어쩌란 말인가.나는 슬그머니 두 발짜국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교생선생님은 그런 내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 어디가시려고요..?!"
"아 어디 가는 건 아니고요. 스트레칭이라도 좀 하려고."
"우리 선생님은 못 뛰실 거니까, 우리가 열심히 뛰어야 해요!!"
고호맙다.. 내 얼굴에 다행스럽게도 느림보라고 쓰여있나 보다. 아무도 내게 기대를 안 하는 걸 보니.. 나는 혼자 바통을 만지작 거리며 둘을 쳐다봤다. 학생의 눈에는 어느샌가 존경심이 어려있었다. 아아, 이토록 단순하다니.
우리는 운동장을 서너 바퀴쯤 돌고 열심히 연습하곤 다시 교실로 올라갔다. 처음 내게 왔었던 주눅 든 모습의 학생은 이제 없었다. 빛의 속도로 뛰는 교생선생님의 모습에 반한 한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그녀가 기뻐하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