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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Sep 14. 2022

9월 13일 김수혁의 하루

명절 다음 날 휴가

휴가 중 가장 기분 좋은 휴가는 연휴 다음 날에 쓰는 휴가일 것이다. 길지 않았던 이번 연휴, 나는 연휴의 끝을 조금 연장하기로 했다. 


“화요일에 연차 좀 쓰겠습니다.”


“뭐? 추석 다음 날 아니야? 일해야지 어디 가게?”


팀장님은 연휴 다음 날 연차를 쓰는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말만 그럴 뿐이다. 이 사람은 언제 연차를 쓰든 간에 항상 이런 식이다. 이번엔 정말 연차를 쓰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이 회사의 유일한 장점이 ‘연차 사용 자유’인데 이마저 막으면 이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지.


여하튼 나는 오늘 연차를 쓰게 되었다. 연휴 다음 날 죽을 상을 하고 출근을 하는 것이 싫어서 선택한 일이었을 뿐 특별히 할 일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점심때쯤 일어나서 낮에 하고 싶었던 게임도 하고 침대에 누워서 만화책이나 보는 것이 유일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휴일을 보내면 굉장히 허무하긴 했지만 일단 이번 연차의 목적은 연휴를 하루 더 쓰는 것에 있으니 목적 달성에만 의의를 두기로 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여유로움을 즐겼다. 친구들은 회사 출근하기 싫다고 앓는 소리를 단톡방에 올리고 있었다. 나도 내일이면 이 소리 하고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즐길 날이다. 나는 친구들을 놀리며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했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 지금 점심을 먹으면 저녁때 밥을 먹기가 애매해지는 것 같았다. 어제 먹다가 남은 사과를 냉장고에서 꺼내 입에 넣었다. 오늘 점심은 이걸로 대충 해결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사과를 입 속에 욱여넣고 창 밖을 바라보니 오늘 같은 날 집에만 있기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차를 끌고 갈까 생각하다가 그러면 집에 갈 때 퇴근 시간과 겹쳐서 휴가를 쓴 보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아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어디를 갈까? 예전에 보고 싶었던 전시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평일에는 시간이 없어서 안 되고 주말에는 사람이 많아서 갈 수 없는 곳. 연휴 다음 날이라 나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인지 전시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파가 있었다. 그래도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여유롭게 전시회를 보기로 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전시는 자연을 주제로 한 현대 미술이었다. 어렸을 때는 현대 미술이 허세가 가득한 장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이만큼 지적인 문화 활동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작가의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작품을 상세히 살펴보면서 나만의 해석을 곁들이는 작업이 꽤나 재미있었다. 또한 이를 통해 내 사고도 깊어지는 것 같았다. 요약하면 내가 어릴 적에 혐오하던 지적인 허세를 내가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작품을 보는 것과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전시는 1시간 30분 정도 관람했다. 인상 깊은 작품도 있어 작가 이름과 작품 이름을 따로 적어놨다. 


전시회장을 나와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시켰다. 카페 밖에 있는 테라스에 앉아 커피가 아닌 여유를 마셨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내 마음속에 있던 복잡한 감정을 날려 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돈만 여유롭다면 회사를 다니지 않고 이런 생활을 평생 하고 싶다.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너무 늦게 집에 가면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빨리 집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 마시지도 못한 커피를 버리고 서둘러 지하철을 타러 갔다. 


겨우 집에 도착하니 평소에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1시간 빨랐다. 집에 오니깐 뭔가 우울해졌다. 내일이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내일이면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3일이나 더 근무를 해야 다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냉동실에 보관하고 있던 짜장면 밀키트를 꺼냈다. 오늘 저녁으로 먹을 음식이었다. 오늘 먹은 것이라고는 사과와 커피뿐이라 짜장면을 2~3그릇이라도 거뜬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밀키트에 담딘 짜장면은 2인분이었다. 좋다. 이 정도면 내 허기를 채우는 데는 충분했다. 


급하게 음식을 만들고 허겁지겁 먹었다. 냉장고에 넣어둔 먹다 남은 콜라와 함께 짜장면을 들이켜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핸드폰으로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봤다. 먹은 그릇도 치우지 않고 구부정한 자세로 영상을 보고 있으니 한량이 따로 없었다. 


그때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너무 빨리 먹은 탓 같았다. 게다가 밀가루 범벅인 짜장면….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가서 오늘 저지른 죄악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몇 번의 사투 끝에 화장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제 퇴근한 직장인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누릴 수 있다는  밤이 되었다. 낮에 지식의 허세를 누리던 내 모습은 버리고 완벽한 한량이 되어 이 밤을 누리기로 했다. 나는 바로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 게임만 했다. 배는 안정을 되찾았고 내 자세도 편안해졌지만 게임이 잘 되지 않아서 내 마음은 고요와 멀어졌다. 


그렇게 게임을 1시간 정도 하니 이제 눈이 아팠다. 부엌에 놔둔 영양제를 하나하나 체크하며 한 알 씩 삼켰다. 이 영양제들이 정확히 내 몸 어디를 좋게 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마음의 안정은 주기 때문에 약간의 역할은 하기는 하는 것 같다. 영양제를 다 삼킨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게임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연휴의 진짜 끝이 찾아왔다. 더 놀고 싶지만 이제는 눈이 감겨서 더 이상 휴가를 즐길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몸을 씻고 자야 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모든 게 귀찮아졌다. 목욕은 어차피 내일 아침에도 할 수 있으니 나는 이대로 잠에 들기로 했다. 이렇게 남들보다 하루 더 사용한 나의 추석 연휴가 완전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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