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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Oct 21. 2022

10월 21일 이정원의 하루

아직도 그러고 다닌다니?

정원은 오늘 퇴근하고 전 회사 동료를 만났다. 어딜 가나 사람 많은 금요일 었지만 정원은 그나마 한적한 곳을 골라 동료와 밥을 먹었다. 술과 안주거리를 시키고 ‘요새 어때요?’라는 흔한 인사말에서 시작되는 평범한 만남의 자리였다.

정원이 오늘 만난 동료는 수현과 명진이었다. 정원은 수현과는 같은 부서였고 명진과는 다른 부서였지만 업무 특성상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서로 고민하는 것도 맞았기 때문에 셋은 회사에서 쉽게 친해졌다. 회사에서 같이 점심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퇴근하고 나서도 같이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퇴사를 하고 나서도 셋은 계속해서 연락했다. 정원이 먼저 퇴사했고 그다음으로는 명진이 회사를 떠났다. 수현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있었다. 단톡방이 있어서 평소에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눴고 아주 가끔 오늘처럼 저녁에 만나 술을 마셨다. 2달 후면 수현이 결혼을 하는데 정원은 명진과 함께 그녀의 결혼식에 가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이 수현의 청첩장 모임은 아니었다. 오늘은 서로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 회사 요새 어때요?”


각자의 안부에 대해서 충분히 물었다 생각한 정원은 넌지시 전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제는 각자 다른 회사를 다니는 셋이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전 회사 이야기만 한 것이 없었다. 정원이 운을 띄우자 명진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수현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똑같죠. 뭐. 얼마 전 조직 개편이 되었는데 그냥 팀 이름만 바뀐 정도예요. 그걸로 또 호들갑 떠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긴 했어요.”


정원의 전 회사는 조직 개편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다. 인력의 효율적인 배치라고 했지만 구성원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그것이 업무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를 빌미로 일을 잘하지 못 하는 사람들에 대한 숙청 작업이 이루어질 뿐이었다. 정원은 회사에서 또다시 조직 개편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또 누군가 회사를 떠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데릭은 아직 잘 있죠?”


셋이 술을 마실 때 안주거리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데릭의 이름이 명진의 입에서 나왔다. 


“에이…여전하죠. 술 한잔 따라주세요! 술 당기게 하네요”


수현은 데릭의 이름을 듣자마자 잔을 내밀며 술을 더 달라고 했다. 그만큼 그녀에게 데릭은 스트레스의 대상이었다. 명진이 수현에게 술을 따르자 정원도 자신의 잔이 비었다며 소주병을 달라는 제스처를 명진에게 보냈다. 명진은 수현의 잔을 따르고 정원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잔까지 술을 붓고 정원과 수현에게 건배를 하자고 했다.


“벨라님도 어서 그 망할 회사를 떠날 수 있기를 바라며!”


명진의 말과 함께 셋은 잔을 부딪혔다. 명진은 바로 소주를 원샷했고 수현은 두 번에 나눠서 마셨다. 술이 약한 정원은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크으’라는 누군가의 감탄사와 함께 잠시 테이블에는 정적이 흘렀다. 주변에 시끄러운 아저씨들의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들렸다. 


정원의 전 회사는 영어 닉네임을 쓰는 곳이었다. 정원은 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수현은 벨라, 명진은 진이라고 불렸다. 데릭은 그들의 동료였다. 직책이 의미 없는 회사였기에 정확히 상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데릭은 세명, 특히 정원에게 일을 많이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셋은 데릭을 싫어했다. 

회사에서는 영어 닉네임만 계속 사용했기에 다들 직원들의 본명을 잘 알지는 못 했다. 정원과 수현, 명진은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서로의 본명을 알고 있었지만 퇴사를 한 지금도 밖에서 만나면 서로의 닉네임을 부르곤 했다. 데릭 같은 경우는 셋 중 누구도 본명까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데릭이라 부르고 있다. 

데릭은 전형적인 남 탓을 하는 사람이었다. 잘 된 것은 자기 덕, 못 되면 남 탓. 그것이 데릭에서 많은 미움을 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 쫌생이 기질까지 있었기 때문에 데릭은 회사에서 환영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데릭은 철면피 기질도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뭐라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데릭이 한 진상짓은 끝이 없었다. 정원과 수현, 명진은 서로 겪은 데릭의 행동들만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 셋이 친해진 것도 서로 데릭을 디스 하면서였다. 

수현은 최근 데릭이 했던 일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데릭이 원래 하던 밉상짓이었기에 특별한 것은 없었지만 정원과 명진은 흥미롭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 데릭 어쩌면 팀장급이 될 수도 있데요.”


수현의 예상치 못한 말에 정원과 명진은 어이없어했다. 둘은 술잔을 채우면서 수현에게 더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회사 신사업 부서가 생기는데 거기로 가나 봐요. 그 스티브 님이 데릭이랑 친하잖아요? 그래서 친구한테 직책 하나 주는 것 아닐까요?”


수현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스티브는 회사의 이사급인 인물이었다. 그가 스티브라는 닉네임을 정한 이유는 스티브 잡스를 좋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스티브 잡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고 인성은 그보다 더 안 좋은 사람이었다. 스티브는 데릭의 대학 선배였다. 데릭이 회사에서 잘 버티고 있는 것은 선배이자 이사인 스티브 덕분이었다. 그런 그가 데릭을 승진시킨다는 것이었다. 


“와 진짜. 거기 노답이다.”


정원이 말하자 명진도 끄덕였다. 


“이 정도면 에드도 공범이에요. 묵인하는 거잖아요.”


명진이 말하는 에드는 대표의 닉네임이었다. 에드는 조용하게 일을 하는 타입이었다. 에드는 다툼을 싫어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 하고 스티브하고만 이야기했다. 그래서 회사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스티브였다. 명진은 그런 에드를 그리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대표가 대표 노릇을 해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전혀 안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그래서 아주 지 세상이에요. 데릭이 하는 진상짓이 더 심해졌다니까요.”


수현은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아직도 그러고 다니네요. 걔가 정신 차릴 가능성은 없고 회사도 마찬가지이니 벨라님도 결혼하고 어느 정도 정리되면 이직해요.”


정원이 아까 따른 술잔을 이제야 비우면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자 친구가 자기 아는 사람 통해서 추천서 놓아줄 수 있다고 해서요. 결혼하고 나면 제대로 준비해보려고요.”


“오, 다행이다. 자, 우리 다시 짠 할까요?”


명진은 다시 각자의 술잔을 채우면서 건배를 권했다. 셋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셋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데릭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전 회사에 대한 다양한 디스로 이어졌다. 데릭 외에 스티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름까지 나왔다. 정원과 명진은 그런 이야기를 하며 탈출에 성공한 자신들의 처지에 감사했고 수현은 어서 회사를 떠나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다고 해서 정원과 명진이 지금 다니는 회사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기계적인 리액션만 나올 뿐 서로 공감할 수가 없기에 그들은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전 회사에서 만난 셋은 그저 전 회사를 안주거리로 삼아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이 모임도 수현이 만약 퇴사를 하게 되었을 때는 서로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 계속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모임은 더 이상 발전의 여지없이 어두워지는 밤과 함께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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