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고개를 숙여 엽서를 쓰고 있다. 고개를 돌리니 부드러운 곡선의 작은 창밖에 십여 일 동안 함께 한 시간이 구름 사이로 흐른다. 한밤중에 공항에 떨어져 노년의 택시 기사와 구도심을 돌아다니며 문 연 숙소를 찾기 위해 새벽 거리를 헤매던 일, 기사와 호텔이 짜고 벌인 사기극이 아닌가 의심하며 결국은 구한 방에서 깨어난 아침, 우리를 맞이하던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가 동시에 조망되던 환상적인 숙소의 풍경. 카파도키아로 가던 심야버스에서 우리 자리 쪽으로 한 자리씩 조여오며 자리를 옮기던 삼각형으로 앉은 세 남자와 동행한 공포스러운 밤의 기억. 난방도 안 되던 동굴 숙소에서, 자다가 입 돌아간다는 말이 뭔지 제대로 실감하게 된 얼어 죽을 뻔한 추운 밤. 아무도 없는 파묵칼레에 올라 단둘이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저 말없이 감탄만 하던 아침. 대중교통이 없어서 무작정 걷다가 결국 어딘지도 모를 길거리에서 히치하이크해 안탈리아로 간신히 이동했던 하루. 그 밖에도 무수한 사건과 경험 속에 그녀와 내가 함께 떨고 같이 웃고 있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무수한 사건과 경험 사이에는 그녀와 내가 나눈 냉랭한 한기가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여 있다. 우습지만 한편으론 매우 진지하게도 한기의 이유는 백 퍼센트 밥 때문이었다.
기억이 있는 한 어렸을 때부터 나는 아침밥을 꼭 챙겨 먹었다. 정확히는 먹여졌다. 가난하고 바쁜 살림살이에도 엄마는 아침밥은 무조건 먹는다는 주의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어서 본인이 안 차려도 자녀가 밥은 꼭 먹고 등교하게 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침에 밥을 챙겨 먹는 게 습관이 된 나는 지금도 아침에 굶는 것은 생각도 못할 뿐 아니라 (안 먹으면 당 떨어져서 손 떨리고 어지럽다) 시리얼이나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면 뭔가 똥 싸고 밑 못 닦은 꼴로 종종거리며 금방 밥을 찾아 서성인다. 비로소 밥을 먹어야 어떤 일에든 마음을 내려놓고 차분히 집중할 수가 있다.
그녀는 아침밥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한다. 아침밥뿐이랴, 온종일 굶어도 크게 힘들어하지 않는다. 직장 생활에서 사람들에게 헌신적이고 일에 열심인 그녀는 점심시간에도 일 처리를 한다고 밥을 거르는 일이 태반이다. 일이야 항상 밀려오는 것이고 지금 한다고 이따 일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다들 먹고살자면서 서둘러 식당으로 우르르 향할 때도 그녀는 언제나 세상사에 초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방긋 웃으며 “먹고 와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걱정되어 몇 번 기다릴 테니 같이 먹자고 했지만, 그녀는 정말 배가 안 고프다며 서류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배 속에서 꾸르렁거리는 식욕 짐승을 저지하지 못하고 이내 패배하여 혼자 식당으로 털레털레 내려가곤 했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가 진짜 너무 안 먹는다며 신기해했다. 가끔 같이 저녁을 먹을 때도 그녀는 맛있게 밥을 먹긴 했지만, 식탐을 부리거나 허겁지겁 잔뜩 먹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언제나 보기에 부족하다 싶게 먹었으며 가리는 음식도 많아서 처음에는 부서 회식 메뉴를 그녀에게 맞추려고 했던 동료들도 언젠가부터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회식 장소를 잡았다. 그녀는 항상 회식 자리에 앉아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아주 조금 먹었다.
마음이 따뜻하고 배려심이 넘치며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가 나는 좋았다. 함께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다. 둘이 다닐 때도, 여럿이 함께 갈 때도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이므로 그녀와 내가 여행을 할 때 그녀는 운전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종이 지도를 펼쳐 놓고 길을 안내했다. 지금도 친구들이 가끔 나보고 운전도 안 하는데 길을 잘 안다고 얘기해 줄 때가 있는데 그때 지도를 보면서 국도와 고속도로를 넘나드는 여행을 한 덕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그녀와 단둘이 하는 장기간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우리 둘은 모두 신이 났고 첫날의 우여곡절을 겪고 구한 숙소에서 펼쳐진, 다음 날 아침의 아름다운 보스포루스 해협 풍경에 감탄하며 이번 여행이 왠지 너무 좋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스탄불의 구도심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파노라마 뷰를 가진 호텔 식당에서 방값에 포함된 조식을 즐기며 나는 신이 나서 빵가루를 흘리며 떠들어댔고 그 풍경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셨다.
우리는 돈을 적게 쓰는 배낭여행자였기에 첫날의 숙소는 아름답지만, 더 싼 숙소로 옮기기로 했다. 발품을 팔아 묵게 된 숙소에서 그녀는 조식값을 포함하면 너무 비싸니 조식 없이 방을 잡자 했다. 터키식 호텔 조식은 어디나 똑같이 나오니까 밖에서 다른 걸 먹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한 나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의 눈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아침밥 먹을 곳을 찾아 눈동자를 쉼 없이 굴리는 내 옆에서 그녀는 첫 번째 관광명소를 지도에서 찾으며 바로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아침밥은…? 그녀는 생각이 없다 했다. 그때는 밥에 매달리는 게 어쩐지 여행 하수를 넘어서 본능만 가득한 동물로 느껴져 나도 식당을 가자는 말을 못 하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담대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곧 어지럼증이 왔고 뭔가 먹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에게 사정을 말하고 길거리에서 수레를 끌고 다니는 빵장수를 찾느라 나는 애 잃은 어미 마냥 헤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빵장수를 찾아 오백 원짜리 커다란 빵을 한 개 샀다. 그녀와 나는 빵을 뜯어먹으며 관광명소를 돌아다녔고 빵을 질겅질겅 씹는 맛에 도취하여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점심때가 되었다. ‘뭘 먹을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민이다. 나는 가리는 음식이 많은 그녀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아침을 빵으로 때웠기에 그녀가 뭘 먹자고 하든 다 맞춰줄 수 있는 식욕이 내겐 세팅되어 있었다. “아침에 남은 빵 먹으면 안 돼요?” 털썩. 그렇게 점심을 걸렀다.
배가 점점 고픈 나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고 그녀에게 저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식당에 가서 꼭 먹겠노라고 선포했다. 그녀는 그러자고 했다. 대망의 저녁 시간, 구시가의 돌길을 끼고 자리한 길거리 테이블까지 있는 운치 있는 작은 식당에 들어간 우리. 행복한 표정으로 음식을 몇 가지 시키고 싶은 나는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하여 심사숙고 끝에 메뉴 두 가지만 딱 골랐다. 시시 케밥과 양고기스튜였다. 닭고기밖에 안 먹는 그녀는 곁들임으로 나온 빵만 먹었다. 양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실험해 보자고 시켰으나 그녀는 한 입 먹더니 다시는 스튜를 뜨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혼자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빵만 주로 먹는 그녀의 눈치가 보였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소리 없는 식사 전쟁은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나는 아침을 못 먹어 배고프면 화가 났고, 그녀는 점심때 내가 먹는 걸 고르고 식당으로 가는 시간, 먹는 시간을 내 앞에 마주 앉아 기다리며 볼 것 많은 터키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여야 했다. 먹는 시간을 뺏겨서 화가 나는 나와 보는 시간을 뺏겨서 화가 나는 그녀는 여행 내내 식사 시간만 되면 서로 날카로워지는 서로를 느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어려서 때론 따로여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함께 한 여행이고 좋아서 같이 다니는 여행이니 같이 보고 같이 즐기고 같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같이하는 시간 속에 서로의 다름을 참느라 소비되는 감정과 쌓여가는 원망이 ‘같이’의 시간을 망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서 비행기 앞 좌석에 붙어있던 테이블 손잡이를 돌려서 내린다. 밥시간 외에 그녀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은 좋았다. 처음 보는 세상, 시간을 거슬러 살아남은 아름다운 유적, 낯선 자연 풍광과 수많은 미술품. 낮은 지붕과 돌길들, 거대한 문명이 충돌하고 쇠락하며 남긴 흔적들. 그 속에서 만난 친절한 사람들. 여행의 즐겁고 경이롭고 행복한 모든 순간 속에 그녀가 함께 있었다. 물론 둘이 함께 먹었던 맛있는 식사도 간혹 있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A4 크기의 작은 테이블에 몸을 오그리고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이 모든 기억에 함께해 줘서 고마웠다고. 좋은 여행이었다고. 당신은 다정하고 멋진 여행 파트너였다고. 그리고 미안했다고.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쓴다.
비행기가 착륙을 알리고 우리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내렸다. 공항에서 마주 보고 집에 잘 들어가라고 헤어지던 그녀에게 비행기 테이블에서 쓴 편지를 건넸다. 그녀도 나에게 엽서를 건넸다. 아까 그녀가 쓰던 엽서다. ‘아, 나에게 쓰던 것이었구나.’ 한 명은 너무 먹어서 미안하다고 한 명은 너무 안 먹어서 미안하다고 쓴 편지. 서로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내용을 보며 한참 웃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다음에도 함께 여행했다. 점심때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도, 하루는 같이 다니다가 하루는 따로 다니기도 하는 아주 잘 맞는 여행 파트너가 되었다.
평소에는 아주 잘 맞고 친하던 관계도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여행지에서는 불편한 순간이 생기고 만다. 너는 나와 똑같지 않으니 어쩌면 하루 내내 취향이 일치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욕심이다. 무엇보다 너는 나와 다르니까 내가 지루함 없이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는 사람이지 않던가. 맞지 않는 순간을 확인하고 약간의 어색함과 서운함을 안은 채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 우리, 비행기 앞 좌석에 끼워진 테이블을 내리자. 그리고 여행지에서 산 예쁜 엽서 한 장을 꺼내 상대에게 편지를 쓰자. 나와는 다른 너와 여행해서 나는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새로운 나를 보게 해 준 너에게 감사하다고, 우리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더 잘 여행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