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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Oct 24. 2019

나는 백수다, 아버지도 백수다

부녀 백수 만만세

너희 그러다 실업자 된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키가 작아 맨 앞에, 그것도 선생님의 교탁 바로 앞에 앉아 있곤 했다. 그날은 미술 과목을 배우는 날이었고, 기말고사를 앞두고 그림 대신 책을 잡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공부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자, 선생님은 갑자기 아이들을 자극하기 위한 묘책을 찾아냈다.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좌중의 시선과 침묵을 기다렸다. 이윽고 아이들이 선생님이 서 있는 칠판을 바라보자, 선생님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너희 그러다 실업자 된다. 백수 된다고."


아이들은 실업자?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곧 예비 실업자들인 셈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대체 왜  미술 시간에 딴짓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실업자가 되어야 하는가, 의아해했다. 미술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세상에서 실업자가 제일 불쌍한 거야. 실업자는 자기 할 일이 없으니까. 너희, 할 일이 없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쌍한 일인 줄 아니? 너희처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실업자가 되는 거야. 실업자가 되면 인생이 망할 수도 있어."

      


선생님은 겁이라도 주어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리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미술 필기시험을 대비해 연필을 들고 1번, 2번, 3번 등에 동그라미를 치고 밑줄을 그을 것이라 믿었나 보다. 평소 붓을 들고 그림 그리는 일에도 종종 심드렁했던 우리였으니, 그날처럼 연필을 들고 비좁은 교실에서 검고 빽빽한 글자들을 바라보는 일이야 오죽했을까.


공부하라는 압박을 가하기 위해 난데없이 등장해야 했던 미술 선생님의 ‘실업자 필패론.’


물론 아주 큰 어른이 되고 나서는 동의하기 싫었던 그 이론에 가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렌데 여기 그 이론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자는 ‘어둠이 내린 창에’라는 제목으로 자기 삶의 일부를 써 내려간다.       




어둠이 내린 창에     



-쌀이 떨어졌네.

 아내가, 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쌀이 떨어졌다고…….

 일손을 놓은 지 벌써 삼 년이 지났습니다. 쌀독이 바닥을 드러낼 때도 됐습니다.     


 어둠이 내린 창에,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이 굴절되어 밀물처럼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그 얼굴은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아버지, 쌀이 떨어졌습니다…….     


-여보, 내일 아침 솥에 안칠 보리쌀이 한 됫박도 안 남았어요.

 첫째와 둘째는 건너 할머니 방에서 자고, 올망졸망한, 누가 셋째고 누가 넷째인지, 고만고만해서 구별이 잘 안 되는 다섯 아이들이 잠든 사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직 잠이 들지 않은 여섯째가 그 소리를 엿들었습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바지저고리를 찾아 입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버지는 어느 친척 집으로 보리쌀을 꾸러, 야밤에 사립문을 나서고 있었습니다.     


 동네 어느 집 개가 곡(哭)을 하듯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2011. 3. 24.     



아버지의 이야기인지 내 아버지의 아버지 이야기인지, 혹은 아버지라는 이름이 달린 모두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자의 창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안다. 실업자일지 모를 글 속의 그 남자는 그 옛날 내 미술 선생의 말대로라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어야 했다. 자고로 예부터 불쌍한 사람은 도우라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자를 쉬이 돕지 않았고, 그자의 시계는 성장(成長)이나 성공(成功)과 같은 ‘이룰 성(成)’을 품는 일 없이 느리게만 흘러갔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고작 10분 내지 20분이던데, 아버지의 쉬는 시간은 한 달, 두 달, 그리고 1년, 2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 옛날 내 미술 선생의 말대로 ‘실업자’여서 아버지의 쉬는 시간이 그렇게 길어진 건지도 몰랐다. 그때의 내 아버지는 ‘실업자 필패론’에 맞서기 위해 책 하나로 하루하루버텼다. 옥탑방으로 올라가 책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남들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하루하루를 갉아먹는다고 생각했을 테고, 아버지는 책들을 보며 하루하루를 쌓아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때의 아버지 손에 책이 들려 있던 이유는 하루하루를 쌓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들었던 차장님, 부장님 소리를 버려야 했을지도 모르고,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이유로 ‘잘 나가고 잘사는 작은아버지’ 여야 했던 자신의 항렬을 버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명절이면 트렁크에 선물이 제법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또 귀찮게 짐 날라야 해?’ 자다 말고 대문 밖으로 동원됐던 내 어린 시절 속  짐꾼을 기억한다. 어린 짐꾼들, 즉 나와 내 동생에게 풍족한 명절 밥상을 안겨 줬던 아버지의 그 시간들을 아버지는 스스로 비워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께서 달려오시던 그 탄탄대로의 고속도로에서 이젠 방향을 비틀어야 할 때임을, 정말 다른 샛길로 빠져나와야 할 때임을 깨달아야 했으리라. 이제 겨우 쉬는 시간이 생겨 책을 좀 읽겠다는데 세상은 잠시 멈춰 선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책이나 읽고 있는’ 선비 같은 그를 옥상에서 끄집어 내렸다. 어찌 되었건 그가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가장에게 일손 대신 빈손, 혹은 책을 든 손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은 그렇게 가족의 애를 태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때의 아버지를 내가 답습한다. 그 길을 그대로 따르려는 듯 사회의 첫발을 ‘백수’로 내디뎠다. 나는 내 삶을 ‘노력하지 않는 실업자’로 출발시켰다. 출발선이 뒤처지면 자연스럽게 삶의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책 한 권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던 그 느린 시간들을 생각한다. 그 시간은 종종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고 늘어지곤 했다. 나 역시 종종 내 삶에서 그때 그 아버지의 옥상을 찾아가는 시간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래도 아버지는 사회의 부침을 이겨내며 살아간 세월이 있었고,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시키려 노력한 흔적이 꽤 깊이 패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실업자를 택했고, 임용고사를 본다는 핑계로 백수 아닌 백수가 되었다. 바늘구멍 같은 미래를 뚫고 들어가느라 안간힘을 쓰며 20대를 버텼다. 그러다 어느덧 30대가 되었고 느린 나이에 첫 직장인이 되었다. 물론 임용고사에는 아쉽게, 혹은 당연하게도 ‘필패’했다.(실업자는 필패하니까.) 30대에도  ‘아버지의 옥상’이 틈틈이 나를 찾아왔다. 졸아서는 안 되는 시기였고, 채찍질을 해대며 몰아세워도 시원찮을 인생이었다. 그러나 나는 책들을 펼쳐놓고 오후 낮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때 나는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였다. 내게 책 읽기는 내 인생의 마지노선이었다. 마지막 '안전 그물망' 같은 존재가 내게는 바로 책이었다. 백수의 골방에 처박히고서야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딸을 둔 백수 아버지가 하릴없이 넘겼을 그 무수한 책장들, 그 책들이 꽂혀 있던 옥탑방을 떠올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 시간들, 그렇게라도 버티고자 했던 아버지 인생의 마지노선, 그 책 읽기의 역사(役事). 내 인생의 마지노선을 맛보고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누구의 말대로 실업자는 망한다.
그러나 실업자가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더 망한다.


인생의 마지노선, 그 인생의 그물망에서 튕겨 올라가 본 사람, 실업자가 되어 자신의 인생이 끝장났다는 느낌, 그 ‘폭삭 주저앉은 느낌’으로 하루를 가득 채워 본 사람만이 살아가며 아주 조금이라도 ‘덜’ 망한다. 도로에서 이탈해 본 사람, 길 찾기 서비스 없이 스스로 랜턴을 들고 어두운 샛길을 빠져나가야 했던 사람만이 막다른 길목 앞에서, 그래도 확률적으로 ‘덜’ 당황한다.     

  

‘해 봤으니까. 살아 봤으니까’     


나도 아버지도 ‘백수’로, ‘백수의 시간'을 살아 봤다. 물론 백수의 시간이 없었어도 좋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럭저럭 유복(까지는 아니디라도 다복)했던 유년 시절, 누릴 것 잘 누리던 그 시간을 지속하며 어디 외국에 유학이라도 좀 고 해외여행도 제집 드나들 듯 지냈어도 꽤 괜찮았으리라 아주 가끔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느리게 살아간 시간들이 우리에게 준 느린 선물들을 되새긴다. 사람들이 출근하고 없는 시간,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산책길을 걸었다. 가끔 김밥을 싸 들고 동네를 걷고 산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도시 어느 공원에서 우리는 저 멀리 씽씽 달리는 차를 보며 아무 데나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싸 온 음식을 펼치며 깔깔거렸다. 대놓고 펼쳐 보이지 못했던 텁텁하고 깔깔한 서로의 속마음은 잠시 접어 두고, 김밥과 과일과 커피를 나눴다. ‘다음 날 출근’이란 게 없는 나였기에, 또 아버지였기에 부녀는 어머니를 꼬드겨 늦은 밤 맥주 한잔에 ‘이야기꽃’을 안주 삼아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 밤을 즐겼다. 우리의 밤은 길었고 어느 신선이 두고 간 도낏자루는 웬일인지 썩을 줄을 모르고 밤새 우리 곁을 지켰다.      


그렇게 백수의 밤은 느리게만 흘러갔다. 우리는 그 뒤로도 더 더 천천히 걸었다. 우리가 너무 천천히 걸었기에 시간마저도 우리를 앞질러 갔다. 우리는 괘념하지 않았다. 우리에겐 아직 우리의 시간이 있었다.     



너무나 느리게 다가오는 ‘다음’이라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우리 부녀는 여전히 뒤를 보며 태연히 걷는다.
실업자는 반드시 패한다지만 우리는 한 번도 ‘삶’이라는 업을 놓아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패하지 '않았다', 혹은 '않는다.'
우리 부녀의 인생은 앞으로도 쭉 '실업자 필패론'을 거스르며 천천히 이어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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