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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책장봄먼지 Nov 11. 2019

거참, 사람이 못쓰게 되더라

많이 묵었다, 고만하자

-사람이 좀 못쓰겠더라.

-어떤 사람이 못쓰는데요?

     

알고 보니 못쓰겠다던 그 사람은 ‘아버지’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자꾸 못쓰게 되더라’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못쓰게’ 된 까닭은 순전히 나 때문이다. 이 사건은 내가 아버지 안에 불똥을 지피고 큰불을 질러 버린 데서 출발한다.     


글이 참 좋습니다.     



그 사람은 아버지의 글이 참 좋다고 했다. 날을 잡아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도 말했다. 아버지는 놀랐으리라. 안에서만 꿈틀대던 아버지의 생(生)이 글자로 태어났고, 그 글자들은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안에서만 키우던 그 품 안의 자식들이 날개를 달고 날아갈 채비를 했다. 아버지의 얼굴에 생기가 어렸다. 65만 시간,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다시 사춘기 소년의 설렘이 살아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은 꽤 묵직한 즐거움이었다.


출처: pixabay


사실 이 즐거움을 처음 만든 사람은 바로 ‘나’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달뜨게 했다. ‘그 여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첫 독립출판물을 내신 후로 아버지는 5년의 세월을 또다시 글과 함께 보내셨다. 몇 년간 아버지 서랍 속에, 그리고 아버지의 폴더 속에서 흩어진 글자들로만 존재했던 글들이었다. 이제 글을 좋아하는 큰딸 덕에 아버지의 글, 아버지의 시간이 세상의 빛을 보게 생겼다.      



-한 권 분량이 될 만큼 다 쓰긴 썼는데…….

-오오, 아부지! 그럼 잘 엮어서 이제 투고해 봐야죠!



나는 아버지의 글 매니저를 자처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렇다고 거창한 작가가 된 것도 아니면서 고작 한 권의 책을 내 봤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투고 과정을 자신만만히 여겼다. 어떻게 투고를 준비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의 글을 가장 많이 읽고, 아버지의 삶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사람은 큰딸인 나였다. 나는 아버지와 논의하여 출간 제안서를 열심히 쓰고 작가 소개 파일도 만들고, 왜 이 책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지 진심의 글자들을 한 땀 한 땀 엮어 몇몇의 출판사들에 정성스러운 투고 메일을 보냈다. 글 매니저는 아버지에게 투고 사실을 당당히 알렸고, 어디서든 한 군데는 꼭 연락이 오더라는 허언에 가까운 호언장담까지 곁들였다.


출처: pixabay



-김◯◯ 님 되시죠?


아버지가 전화를 받은 건 내가 투고를 한 다음 날이었다. 아버지는 퇴근길의 나(당시는 퇴직 전이었다.)에게 급히 전화를 주셨다. 출판사 대표라는 분이 직접 전화를 하셨고, 아버지 글이 좋아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전해 왔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출판사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꽤 좋은 책들을 많이 내 온 출판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네가 한번 전화해 봐라. 이 투고는 다 딸이 알아서 해 준 거여서 딸한테 한번 이야기해 보고 다시 연락해 주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다 써 놓은 글에 그저 투고라는 다음 단계만 진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내 어깨가 무거웠다. 사실 나는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며 살아오지 않은 인생이라 남의 인생에 감을 놓고 배를 놓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타인의 삶에 어떤 방향키를 제공한다는 일조차 조심스럽고 섣불렀다. 하지만 내 아버지였다. 이건 내 아버지의 삶이었다. 가족 일이라면 두 손 두 발, 아니 두 눈, 두 귀도 모두 서둘러 달려 가려는 나였다. 나는 무거운 어깨를 가뿐히 짊어지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출처: 돈의문박물관마을



-안녕하세요. 출판사 ○○ 대표님이시죠? 김○○ 님 큰딸 되는 사람인데요, 조금 전에 저희 아버지께 전화를 주셨다고 하셔서요.


나는 출판사 대표님과 간단히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나의 통화가 끝날 때까지 내 옆을 지키시며 어떤 말이 오고가는지 두 눈을 반짝이고 두 귀를 쫑긋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과 그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렸다.      


글이 상당히 좋습니다.     


나는 한껏 들떴다. 좀체 들뜨지 않는 아버지도 ‘글이 상당히 좋습니다’라는 출판사 대표의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내 앞에서 다시 읊으셨다.     


이런 글도 있어야죠.     



이 전화는 세상에서 오는 전화였다. 세상에서 아버지의 글을 보고 ‘이 세상에는 이런 글도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해 준다. 사람이 자신의 글을 인정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온 생애를 인정받는 느낌과도 같다. 그것을 아버지도 알고 나도 안다. 그렇기에 가슴 가득 충만히 차오르는 기쁨이 아버지와 나의 마음을 더 단단히 이어 주었다.



-이렇게 하기로 하죠. 우선 원고 전문을 보내 주시고요…….



일단 만나기 전에 원고의 전문을 보내 주면 일주일 안에 출판사 측에서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이제 ‘오케이 사인’만 떨어지면 된다. 곧 있으면 아버지도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정식으로 자기 이름 석 자가 담긴 책을 출간하시는 거다! 동네 제본 집에서 책을 찍어 내던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세상에 아버지 이름이, 아버지의 인생이 당당히 검색대에 오른다. 이제는 아버지의 책이 네이버나 다음의 검색창에서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 날이 머잖아 우리 앞에 당도할 것이다. 큰딸의 어깨가 봉긋 솟았다. 글 매니저로서 첫출발, 그 조짐이 정말 좋았다. 내 첫 고객이 이제 곧 출판계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밥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럼 밥이 중요하제 뭣이 중요하다요.

-밥도 중요하지만 밥 말고도 중요한 게 있당께.

-고기 잡는 어부가 고기 잡을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생각만 하고…….

-고기 잡는 어부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당가.

-안 되고말고.

-사람은 밥만 먹고는 못 산당께.

-아따, 김 씨 문중에 도인 나왔네. 뚱딴지같은 생각 그만 집어치우고 빨리 밥 먹고 멸치 그물 내려갑시다. 물 때 그르치면 그물을 못 낸당께…….





아버지는 평소 당신의 글에서 따뜻한 밥 한 끼가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아버지 안에서는 밥 한 끼보다 더 중요한 삶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삶이 활자들로 다시 움트고 있었고 나는 그 활자들을 꼭 내 힘으로 건져 올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글은 얼핏 평범해 보인다. 마치 아버지의 생(生)처럼, 그리고 그 딸의 삶처럼. 그러나 그 글에는 생(生)에 굳게 단련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단단한 힘 같은 것이 있다. 그 특별한 힘을 나는 아버지의 글에서 보았다. 그러나 그 힘을 함께 본 세상에서…….



-연락 없었어요?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들여다보았다.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부지, 연락 아직도 없어요?

-아직 없었다.


또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같았다. 아직 연락이 없는 출판사 대표의 무심함을 원망하며 나는 아버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아버지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고도 우리 부녀는 1주일을 기다리고 2주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 달, 두 달이 넘도록 아버지의 글이 참 좋다며 세상에는 이런 글도 있어야 한다고 아버지를 추어올리던  이 세상의 말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전화도 그 흔한 메일도 없었다. 크게 실망한 나와 달리 아버지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표정이셨다.      




-다른 데 열심히 더 투고해 보려고요! 제가 아버지, 작가 만들고 맙니다!

-하지 마라. 사람 참 못쓰겠더라.

-네? 못쓰겠다고요? 누가요? 출판사 대표가요?



아니, 투고 더는 하지 말라고.
사람이 못쓰게 되더라고.
괜히 기대하게 되고 뭔가 기다리게 되고.     



우리 아버지, 당신 자신이 못쓰게 되는 모양을 지켜보기 어려우셨나 보다. 사람 참 못쓰게 되더라고, 아버지는 세상을 향한 나의 두드림을 잠시 접으라 하신다. 그 말을 들으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사시는 우리 아버지를, 내가 나서서 '못쓰는 사람' 혹은 '못 쓰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만 같아 괜스레 죄송하다. 그렇게 만든 이 세상도 왠지 밉기만 하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지만 내가 믿은 아버지의 힘과 내가 본 아버지의 글이 세상의 문 앞에서 열릴 듯 말 듯 눈치만 보다 고만 감질나게 닫혀 버렸다. 닫힌 문 앞에서 나는 화가 좀 났다. 그러나 내가 화를 내고 세상 탓을 할 동안 아버지는 되레 자신을 탓하셨다.      



사람이 못쓰게 되더라. 그만둬라.     



아버지는 글 매니저에게 잠시 휴직을 명하셨다. 자기 삶에서 포기가 많고 체념도 잦고, 도약의 중단도 넘치는 큰딸이지만 이번만큼은 아버지 말을 듣기 싫었다. 세상이 안 된다고 하면 내가 세상을 직접 열면 된다. 내가 아버지 세상을 만들 거다. 그래, 내가 직접 책을 만들자! 나는 18만 원짜리 5주 치 인디자인 수업을 들어본 적도 있으니 내가 직접 우리 아버지를 만들면 된다. 인디자인이 뭔지도 아직 잘 모르고 컴퓨터 능력도 한참 모자란 나지만, 그러나, 나, 이것만은 알겠다.     


 


이번엔 이 딸내미가 직접 뛰어야 할 시간이다.      



-아버지, 또다시 사람 못쓰게 되더라도 다시 한번 해 보입시다! 독립출판물로 만들든 다른 곳에 또 투고를 해 보든 까짓 다시 해 보입시다!


아버지는 다시 평온해진 얼굴로 묵묵부답이시다.


"자, 아버지, 실망할 준비, 그러다 또다시 환호할 준비, 모든 준비 이제 완료하셨죠? 자, 이제 같이 뛰는 겁니다!"
아버지의 시간이 또다시 출발선에 섰다.
큰딸이 기어이 아버지의 시간을 붙들고 숨차게, 그리고 신명 나게 달린다.       



내 아버지의 글에
'사람 못쓰게 만드는 글'은 없다.
나는 아버지 글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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