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책장봄먼지 Nov 17. 2019

어이, 짝사랑하지 마러~

부녀의 바보 내기, 누가 누가 잘하나

"3년 전부터 저를 쫓아다니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말을 할 줄 몰라 나는 몇 해 전‘스피치’라는 것을 배웠다. 그날의 스피치 주제는 ‘추억 꺼내기’다. 나는 문득 가장 강렬했던 추억을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 깊숙한 곳에 쑤셔 두었던 내 구석진 과거를 꺼내 들었다. 더는 이 남자와의 관계를 숨길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도망쳐도 이 질긴 인연에서 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건 무리였다.    

  



"이 남자와의 시간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남자는 제 시간을 정말 많이 앗아갔습니다. 밤이면 저를 깨워 ‘뭐 먹을 것이 없겠느’며 간절한 눈빛으로 제게 사랑과 먹이를 갈구했습니다. 낮이면 낮대로 또 같이 놀아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이 남자와의 시간은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스피치 발표를 준비하면서 내가 이 남자에게 어떤 수고로움을 들였는지, 밤새 잠 못 들고 지새운 숱한 날들이 대체 얼마나 되었는지 돌이켜본다.     




"이 남자는 저를 집에도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울면서 집에 가지 말라고 부르짖곤 했지요. 내가 항상 자기 눈앞에 있어야만 하는 남자였습니다. 심지어 이 남자는 화장실 문 앞까지 저를 따라오려고 했습니다. 집착이 정말 심한 남자였습니다. 저는 그 남자의 지독한 사랑을 받았지요. 지난 5년간 말입니다."



그 남자의 집착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남자가 깰까 봐 나는 늘 조바심을 내며 조심조심 그 남자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무조건 그를 달래 주고 안아 주었다. 이런 식으로 날 함부로 대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그가 요구하는 사랑은 정말 너무나 막무가내였으며, 진실로 진실로 위풍당당했다. 




"이 남자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아아. 사실 이 남자는 상당히 미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쉽게 그 남자를 놓지 못했나 봅니다. 사실 부끄럽게도 저는 외모지상주의자입니다. 전 귀여운 훈남 스타일의 남자에게 홀딱 반해 버리는 편입니다. 이 남자와 거리를 걸을 때면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을 걸곤 했습니다. '둘이 진짜 닮았어요!' 그럴 때면 전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이 남자는 참 귀엽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거든요." 



 사실 고백하자면, 나도 이 남자에게 반했었다. 그 남자가 사랑을 달라고 떼쓰는 모습이 정말이지 아주 가끔씩, 너무나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날 꼼짝 못 하게 하는 이 남자. 내 5년을 앗아간 이 남자. 아. 남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날 정신 못 차리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쌩하니 날 모른 척해 버리는 ‘밀당’의 고수.     



"(비장한 표정으로) 그 남자와 나눈 추억 하나를 마지막으로 하나 더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 남자와 즐겨 들었던 추억의 노래, 여기서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스피치를 듣는 사람들이 쫑긋, 내게 귀를 기울인다. 내 철없고 어두운(?) 과거를 소개하자니 조금은 떨린다. 나는 갑자기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 준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아기 상어~ 뚜루루 뚜루~ 귀여운 ~ 뚜루루 뚜루~ 바닷속~ 아기 상어~엄마 상어~ 뚜루루 뚜루~ 어여쁜~ 뚜루루 뚜루~ 바닷속~ 엄마 상어~     

 

https://youtu.be/gX2gOpgoTgw





 이런 스피치를 했다며 한창 재밌는 무용담을 엄마께 늘어놓고 있는데,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불쑥 끼어들어 말씀하신다.     



어이, 짝사랑하지 말어.     



SNS 프로필 메시지는 종종 ‘조카 바보’. 실제로도 나는 쌍둥이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 우리 귀요미들을 먹이고 재우고 어화둥둥 사랑하는 데 내 온 시간을 쏟으며 살았다. 그것이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의 바보 같은(?) 사랑방식에 제동을 거신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거울을 갖다 드린다.



 여기 바보 하나 추가요..



 이 조카바보 뒤에는 ‘상바보’ 한 명이 더 숨어 있다. 사돈이 남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 상바보에게 글 하나를 읽어 준다.     



'예쁘게' 부분에서 크게 실패하신 우리 아부지@-@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난 가볍게 무너져 내렸다. 6~7년 동안 임용고사에 매달려 끝끝내 실패했고, 틈틈이 내 젊은 날을 하얗게 칠하며 백수로 살았다. 가족들은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나의 수렁은 다소 깊었다. 나는 아마 아버지에게 특히 무거운 등짐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딸내미라는 등짐들을 이리 메었다 저리 메었다 반복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짐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그 등짐을 풀어 품에 꼭 안고 살아가기로 하였다. 짐을 안고 걸어가야 했으므로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는 차라리 자유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렇게 꼬박 40년이 흘렀다.

 


"여봐요, 짝사랑하지 말아유..."     



이번엔 내가 외치고 아버지가 고개를 돌린다. 아버지, 자식 짝사랑하지 말아요. 나의 외침아버지가 지난 40년을 뒤돌아보며 화들짝 놀란다.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40년이 다 되도록  개의 등짐을 짝사랑하며 살아왔다. 과년한 두 딸이 자꾸만 아버지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다.     



나의 짝사랑은 그래 봤자 4~5년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짝사랑은 자그마치 30년, 아니 40년이다. 아버지는 40년 동안 자기 시간을 도둑질한 딸들에게 여전히 자기 세월빼앗긴다. 그러고도 아버지는 딸에게는 다시 충고한다.



"짝사랑하지 마러(말아라)~~"



이렇게 바보 대결은 끝이 없었다.
이 대결은 세대를 이어 계속된다.
조카바보 vs 자식바보
바보 부녀는 오늘도 자신의 시간을 무작정 봉헌한다.
이 부녀의 바보 내기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전 18화 나는 백수다, 아버지도 백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