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2)

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by 이유진 봄해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봄 터졌소…"


확성기를 찢고 나온 쇳소리가 광장 위로 부서졌다. 그 소리를 등지고 차 머리가 돌아갔다. 비는 멎었다. 아스팔트 위로 젖은 비린내가 훅 끼쳤다.


수산시장 골목. 점심을 밀어 넣고 나오자 모퉁이의 낡은 간판이 앞을 막았다. 허물처럼 벗겨진 흰 페인트. 철판 위에 검은 글자만 파여 있었다.


동화여관.


유리문이 안으로 밀렸다. 라탄 의자와 백색 조명. 카운터 뒤 나무 벽 위로 사각형 자국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무언가 뜯겨 나간 흔적. 네모난 칸만 나무 색이 허옇게 부풀어 있었다. 내 검지 끝이 허공에서 칸의 개수를 짚고 넘어갔다.


이수가 카운터 종을 눌렀다. 전화벨 대신 '공용 세면장' 문이 열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 축축한 머리칼이 뺨에 들러붙어 있었다. 올리브색 카디건. 어둡게 젖은 청원피스. 그녀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소방 점검 나오셨어요?”


"네, 점검은 아니고 조사 목적으로 왔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등을 따라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누런 수신기. 붉은 버튼을 눌렀다 땠다. 경종이 울리지 않았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 대신 습기 먹은 모터가 겉돌았다. 드르륵—. 진동만 바닥을 타고 올랐다. 이수가 볼펜으로 수첩을 적었다. 경종 불량.


“세면장 문 좀 열어봐도 될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이수가 앞에서 문고리를 돌렸다. 내 구두코가 문턱 앞에서 멈췄다. 축축한 비눗물 냄새. 노란 백열등 아래. 안쪽 작은 탕에서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하늘색 모자이크 타일 위로 물방울 하나가 둔탁하게 떨어졌다. 상체를 반 바퀴 돌려 등 뒤의 출입구를 향했다. 턱을 위로 올렸다. 출입구 상단. 초록색 유도등 불빛이 내 눈에 맺혔다.


계단을 밟고 위층 복도에 섰다. 좁은 나무 문들이 벽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어깨너비 간격. 구두 밑창이 바닥을 칠 때마다 내 손가락 관절이 뻣뻣하게 접혔다. 하나, 둘, 다섯 번째 문 앞. 바닥을 밟는 발소리가 달라졌다. 합판이 닳아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빈 객실이 있을까요?”


그녀 고개가 끝방 쪽으로 틀어졌다.

“방은 다 차서요. 끝에 하나 있긴 한데, 거긴 객실로 안 써요.”


입술 끝에 주저가 스쳤다.

“그래도 보시겠어요?”


내 구두가 끝방 문 앞으로 향했다. 둥근 쇠 손잡이를 쥐고 바깥쪽으로 당겼다. 덜컹. 문틀에 박힌 나무판은 미동이 없었다. 손목을 비틀어 안으로 체중을 실었다. 끼익—. 문이 밀려 들어갔다.


맨 시멘트 바닥. 회색 먼지가 층을 이뤘다. 구두가 바닥에 닿자 먼지가 밑창 모양대로 뭉개졌다. 벽 위쪽으로 뚫린 비좁은 창. 잿빛 채광이 방 한가운데를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창문에서 떨어진 빛줄기 아래. 양철 대야 하나. 낮은 나무 받침대 위, 금속 표면에 검붉게 굳은 얼룩들이 층을 이뤘다. 시선이 대야 옆 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먼지가 앉지 않은 둥근 자국 두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다.


“여기 나중에 객실로 쓰실 거면, 피난 방향으로 문 열리게 고치셔야 합니다.”


그녀의 눈꺼풀이 떨렸다. 입술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 문은… 밖으로 열린 적이 없어요.”


여자의 턱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검은 머리카락이 양옆으로 밀려났다. 그 틈을 뚫고 하얀 살덩이 두 개가 수직으로 솟구쳤다. 위로 뻗은 긴 귀. 복도의 백열등 불빛을 받은 끄트머리가 떨렸다. 그녀의 까만 동공이 내 눈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목울대가 굳었다.


두 개의 하얀 귀는 닫힌 시멘트 방 안에서 새어 나오는 둔탁한 소리들을 모조리 삼키고 있었다. 관덕정 광장. 우산을 기울이던 여자. 북소리에 맞춰 귀가 떨리던, 바로 그 여자였다.


나는 턱이 굳은 채 계단을 밟았다. 한 층을 내려올 때마다 콧속의 비릿한 냄새가 깎여나갔다. 로비의 백색 조명이 시야를 채웠다. 오래된 합판의 울림이 구두 밑창에 남아 있었다. 카운터 안쪽. 그녀가 유리잔에 갓 내린 검은 액체를 붓고 있었다. 짙은 원두 냄새가 로비의 공기를 덮었다.


“커피 드릴까요?”


입천장에 혀가 말라붙어 있었다. 굳었던 목이 풀리자 식도 안쪽에서 뜨거운 숨이 밀려 올라왔다.

“혹시 차갑게도 될까요?”


그녀의 손이 금속 집게를 쥐었다. 얼음 조각이 유리벽을 치며 떨어졌다. 잔 안에서 투명한 덩어리가 쩍, 갈라지는 파열음이 났다. 여자의 정수리 위 귀 끝이 찢기듯 움찔거렸다.


이수가 종이 위에 볼펜을 굴렸다. 날짜가 채워졌다. 서명란이 그녀 앞으로 밀어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잡아 귀 뒤로 넘겼다. 덮여 있던 귀의 시작점이 드러났다. 펜촉이 종이를 긁고 지나갔다. 그녀가 종이를 밀었다.


“이제… 끝난 건가요?”

펜의 윗단을 눌러 딱 하고 닫았다.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케이드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쉴 새 없이 정수리로 쏟아졌다.




유리문 밖. 두 남자의 등이 골목으로 사라졌다. 카운터 앞. 소희의 손가락이 볼펜 윗동을 눌렀다. 딸깍. 다시 눌렀다. 위층 끝방. 남자의 눈이 향했던 궤적. 정수리. 머리칼. 귀 끝. 소희의 턱은 정면을 향해 굳어 있었다. 목 근육이 경직되어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설마.


펜이 유리판 위로 떨어졌다. 소희의 손이 카디건 안으로 들어가 아랫배를 쥐어짰다. 배꼽 아래 근육이 돌덩이처럼 뭉쳐 있었다. 얽힌 숨이 멈췄다. 빼낸 손이 카운터 모서리를 짚었다. 조사서 위. 검은 잉크로 파인 자신의 이름. 시선이 활자 위를 걸었다.


위층 복도의 합판이 하중에 짓눌렸다. 박 씨의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낡은 목재가 비틀리는 소리를 냈다. 오 씨의 방은 그 발소리에서 두 칸 옆이었다.


“소희야. 탕 물 받아졌어?”

계단 위에서 박 씨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타일 탕 가장자리. 정희의 뒷목이 닿아 있었다. 눈꺼풀이 닫혔고 물이 쇄골 아래를 덮었다. 치켜든 턱 아래로 목 근육이 당겨졌다. 수면 아래. 앙상한 갈비뼈 윤곽이 물결에 일그러졌다. 다리는 바닥 타일에 닿은 채 떠오르지 않았다.


선영의 손이 타일 벽에 수건을 걸었다. 팔 안쪽. 손목에서 팔꿈치까지 시퍼렇고 노란 멍이 피부를 덮고 있었다. 쇄골 아래. 붉게 패인 이빨 자국 두 개. 맨몸이 탕 안으로 들어갔다. 골반 옆, 손바닥 크기의 피멍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탕 안의 물이 솟구치며 정희의 어깨를 때렸다.


소희가 수건으로 앞가슴을 가린 채 들어왔다. 플라스틱 문이 닫혔다. 머리카락을 둥글게 틀어 올리고 탕 구석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굽힌 무릎이 가슴에 닿았다. 턱 아래까지 물이 찼다. 아랫배 한가운데의 살갗이 한 번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손바닥이 물속을 뚫고 배 위를 덮어 눌렀다.


선영의 시선이 정희의 몸 위를 내려갔다. 쇄골, 맨가슴, 배. 시선이 탕의 물표면에서 막혔다.

“언니는 진짜. 어떻게 그렇게 살아.”


정희의 눈꺼풀이 열렸다.

“뭐가.”


“나이가 어딨어, 몸에. 우리 가게 오면 진짜 돈 많이 벌 텐데.”


정희의 발가락이 물속에서 오므렸다 폈다.

“됐어. 이 나이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나도 집 없이 여기 있고, 언니도 그렇고.”

선영의 팔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룩덜룩한 멍이 물결 아래서 흐릿하게 퍼졌다.


수면이 소희의 귓바퀴 바로 밑까지 닿았다. 물의 압력이 무릎과 배, 어깨의 뼈를 고르게 짓눌렀다. 젖어 뭉친 머리칼이 수면 위로 솟아 있는 귀를 덮어 가렸다.


“소희는 왜 이렇게 조용해. 자?”

선영의 손바닥이 물을 쳤다. 물방울이 튀었다.


“안 자요.”


“그럼, 뭐 생각해. 아까 왔던 소방관들?”

정희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짧은 웃음. 좁은 공간의 타일 벽을 치고 돌아왔다.


“아니에요. 아무것도요.”


선영의 손가락이 물속에서 소희 옆구리를 찔렀다. 소희의 등뼈가 튕겨 올랐다. 솟구친 등이 타일 벽을 때렸다. 철썩. 밀려난 물덩어리가 흩어졌다.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풀려 수면 위로 쏟아졌다. 두 손이 젖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선영의 팔이 거둬졌다.

“나야. 나.”


정희의 상체가 소희를 향해 비틀어졌다. 소희의 등뼈는 타일 벽에 밀착되어 있었다. 가슴이 팽창과 수축을 반복했다. 선영의 손이 물을 가르고 다가와 소희의 손등을 덮었다.


“미안. 몰랐어.”


막혀 있던 호흡이 길게 빠져나갔다. 타일 벽에서 소희 몸이 떨어졌다. 정희의 손바닥이 물속에서 소희의 허벅지를 짚었다. 살이 물속에서 물렁하게 눌렸다. 흔들리던 수면이 멈췄다. 하얀 김이 탕을 채웠다.


“놀랐어요. 그냥.”


선영의 콧바람이 소리를 냈다.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뭉개진 소리.

“나도 놀랐어, 씨.”


정희의 손바닥이 수면 밖으로 솟은 소희의 어깨뼈를 덮었다. 수면 아래. 세 사람의 종아리와 발등이 얽혀 살갗을 맞대고 있었다. 뜨거운 물의 압력만이 그 위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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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잊혀서는 안 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