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에게 간은 없었다
이미지 출처: ChatGPT 생성형 AI — 실제 인물이 아닌 ‘상징적 인물’의 표현입니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스테인리스를 때렸다. 짧고 둔탁한 소리. 아내가 식탁을 등진 채 그릇을 헹구고 있었다. 바운서에서는 아이의 숨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렸다. 나는 아기 띠를 옷걸이에 걸고 아내 쪽으로 걸음을 뗐다. 허리에 내 몸을 밀착시켰다. 아내의 등 근육이 굳었다가 풀렸다.
“또 꿨어?”
아내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응.”
아내가 물이 흐르는 그릇을 싱크대 바닥에 내려놓았다. 젖은 팔을 등 뒤로 뻗어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허리춤으로 내 손을 끌어당겼다.
“또 그 여자?”
목 안이 바짝 말랐다.
“복도였어.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 나무침대가 있었어.”
거기서 입술이 굳어 닫혔다. 침대 밖으로 늘어져 있던 앙상한 발목. 불거진 발목뼈. 귀를 찢던 삐걱 소리가 식탁 위까지 번졌다. 아내가 허리를 비틀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두 손으로 내 양뺨을 쥐고 시선을 맞췄다.
“그 여관 건물, 어떤 데야.”
“동화여관. 오래됐어. 서류에 1944년이라고 적혀 있었어.”
“1944년…”
아내가 그 숫자를 다시 입에 올렸다.
“거기 여주인은?”
“젊은 여자…”
머리 위로 솟아 있던 귀. 아내의 까만 동공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머리 위로, 긴 귀 같은 게 솟아 있었어. 토끼 귀처럼.”
“귀? 진짜로?”
“진짜였어. 근데 꿈에도 비슷한 여자가 나왔어.”
아내의 한쪽 손바닥이 내 뺨을 쓸어내렸다. 눈가에 붉은 핏기가 돌았다.
“처음 꿨을 때 말하지, 왜.”
“일주일이잖아. 매일.”
아내가 반걸음 더 다가와 몸을 붙였다. 젖이 돌아 부풀어 오른 가슴이 면 티셔츠 너머로 내 가슴에 밀착됐다. 두 손이 내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거기서 뭘 보든, 뭘 무서워하든…”
“당신 자리는 여기야.”
아내의 손이 올라와 내 뒤통수를 감쌌다. 이마가 내 이마에 맞닿았다. 맞닿은 체온을 타고, 뼈와 뼈가 맞물리는 온기가 코끝까지 전해졌다. 싱크대에서 물 한 방울이 마루로 떨어졌다. 불빛 아래에서 웅덩이처럼 번져 보였다. 그 안에서 아내 맨발과 내 발이 겹쳐 있었다. 마루결이 흔들렸다. 낡은 판자로. 침대 다리가 긁는 소리가 귀 안쪽에서 돌았다가 꺼졌다. 나는 눈을 들었다. 아내의 얼굴이 나를 붙들고 있었다.
아이가 바운서에서 칭얼거렸다. 아내가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훔쳐내고 싱크대 모서리에 걸쳐 두었다. 내 시선이 텅 빈 소파 위를 훑었다. 어젯밤 내가 웅크려 잤던 자리가 그대로였다. 팔걸이에 구겨진 채 걸려 있는 담요. 아내가 온이를 안아 올리다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이 소파에 머문 것을 본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늘 퇴근하고.”
싱크대 쪽으로 턱을 기울였다.
“저기서 어때?”
허리가 비스듬히 기울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골반을 따라 종아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이의 뺨이 아내의 가슴에 파묻혔다. 문이 닫히고 나는 싱크대에 기댄 채 바닥을 내려다봤다. 물얼룩은 나뭇결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싱크대에 닿은 내 등은 한참 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 트렁크 열었어.”
이나가 트렁크 안으로 유모차를 밀어 넣었다.
아이의 등이 카시트에 닿았다. 서연이 시트벨트 끝을 당겨 고정했다. 손가락이 서연의 검지를 감았다 풀었다. 백화점 주차장. 유모차 프레임이 펴졌다. 온이의 손아귀가 서연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야, 아파.”
서연이 엉킨 머리카락에서 아이의 손가락을 떼어냈다. 잇몸이 드러난 아이의 입. 서연이 유모차 손잡이를 밀었다. 여성복 층. 이나의 손끝이 옷걸이 사이를 지나갔다. 밑단이 짧은 동백 원피스. 천 위로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언니, 형부 이런 거 좋아해?”
이나가 옷을 가슴 위로 겹쳤다. 거울 표면에 다리가 비쳤다.
“입어봐.”
유모차 바퀴가 멈췄다.
“서연…”
짙은 감색 재킷. 넘겨 고정한 머리카락. 한 걸음 뒤, 남자의 구두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정진 오빠?”
피팅룸 커튼이 젖혀졌다. 이나가 걸음을 뗐다. 원피스 밑단이 허벅지 중간에서 끊겼다. 종아리 근육의 굴곡. 굽 없는 구두. 젖이 차오른 가슴이 붉은 원피스 앞판을 밀어냈다. 옷걸이를 잡고 있던 직원의 손이 멈췄다. 통로의 남자 구두가 속도를 줄였다.
정진의 동공이 이나의 맨다리에 닿았다. 시선이 턱 끝으로 올라갔다. 서연이 그 시선을 좇았다. 정진 옆의 구두가 정진 쪽으로 각도를 틀었다.
“잠깐만. 서이나.”
정진의 구두가 앞으로 밀려 나갔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긁혔다.
“오랜만이네. 너 결혼하고…”
이나의 손바닥이 유모차 손잡이를 덮었다.
“응. 잘 지냈어?”
“덕분에.”
정진의 손이 재킷 안쪽을 파고들었다. 종이 명함. 서연의 가슴 쪽으로 뻗어 나갔다. 정진의 동공은 이나를 향해 있었다.
“연락해, 필요한 거 있으면.”
서연의 손가락이 명함을 쥐었다. 빳빳한 모서리가 피부를 긁었다.
제주중앙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 3팀장 이정진.
“잘 가.”
이나가 유모차를 먼저 밀었다. 정진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치마 끝이 걸음마다 허벅지를 스쳤다. 이나 뒷모습이 에스컬레이터에 닿을 때까지 정진의 고개가 그 허벅지를 따라갔다. 서연의 구두가 그 뒤를 쫓았다. 가방 지퍼가 열리고 명함이 안으로 처박혔다. 피부가 긁힌 손끝에 열감이 올랐다.
“언니.”
서연의 구두가 에스컬레이터 발판에 닿았다.
“형부, 이제 괜찮아?”
이나의 손이 검은 고무 손잡이를 쥐었다. 층과 층 사이. 기계가 발판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괜찮아지고 있어.”
카운터 유리판. 조사서 위에 소희의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검은 잉크. 자신의 이름. 소희의 등 뒤로 일렬로 패인 사각형 자국들. 나무벽 단면의 허연 색. 소희의 턱은 그 반대쪽을 향해 굳어 있었다. 전화기 스피커가 진동했다. 두 번의 울림. 손바닥이 플라스틱 수화기를 감싸 쥐었다.
“네, 동화여관입니다.”
스피커 안쪽에서 얽힌 숨이 새어 나왔다. 그 뒤에 목소리. 소희 귀 끝 피부가 수축했다.
“중부소방서 고이운입니다. 경종 수리 확인차 방문해도 될까요. 오후 두 시쯤.”
소희의 맨손이 카운터 모서리 합판을 움켜쥐었다. 배꼽 아래 근육이 수축했다.
“네. 괜찮아요.”
플라스틱 수화기가 제자리에 맞물렸다. 딸깍. 눈이 다시 조사서 위 잉크 자국에 꽂혔다. 유리문이 밀려 들어왔다. 박 씨의 손이 코트 깃을 틀어쥐고 있었다. 문턱을 넘을 때 엉킨 코트 자락이 벌어졌다. 치마 밑단 아래로 노출된 허벅지. 오른쪽 허벅지 맨살 위로 손바닥만 한 피멍이 피부를 검붉게 덮고 있었다. 구두가 계단을 치고 올라갔다. 위층 나무 문이 닫히며 둔탁한 소리를 토했다.
공용 세면장 옆. 덜 닫힌 방문 틈. 바깥의 냉기가 카운터 나뭇결을 타고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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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잊혀서는 안 될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며 쓰였습니다.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은 모두 허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