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기다리지 않는 엄마

들어갈 수 없는 "우리집"

by HeySu

나는 어린 시절 늘 단독주택에 살았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것 같은 덜컹덜컹 소리나는 철대문이 입구인 그런 집이었다.

새소리가 나는 벨을 누르면 집 안에서 사람이 직접 바깥으로 문 열러 뛰어나와야 했고, 돈 들여 장치라도 해야 집안에서 버튼 누르면 텅! 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리는 그런 집.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저학년 어느 날,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나이 터울이 세 살, 다섯 살 나는 언니들은 여전히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 이날도 내가 제일 먼저 하교한 날이었다.

대문에서 집안까지 들릴 수 있도록 “엄마!~”하고 목청 높여 불렀다. 골목길 지나는 사람들 눈치를 흘끗흘끗 보면서 시간 간격을 조금씩 두고 재차 불러댔다. 한참 불러도 결국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운동신경이 좋았던 편인 나는 대문 옆 담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대문은 통과했지만, 작은 정원통로를 지나 본 현관에 다다르니 걱정이 점점 커졌다. 혹시 엄마가 화분 밑이나 문 근처에 열쇠를 숨겨두고 가지 않았을까 한참 찾아봤다. 허탕이었다.

아침에 분명 외출할거란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현관문에 언제 온다 쪽지 붙은 것도 없고 큰일이었다. 언제 돌아오실지도 모르는데 나는 당장 가 있을 곳도 없었다. 고지없이 가신거니 내가 돌아올 시간도 아실테니 돌아오시는 중이겠지 생각했다. 번뜩하고 거실창이 잠겨있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열어봤다. 단단히 굳건하게도 잠겨있었다. 낙담했다.


현관 앞에 쭈그려 앉았다가, 마당 나무에 열린 열매와 흙바닥 풀줄기를 뜯어다 돌멩이로 찧고 놀았다. 일인다역하는게 익숙한 소꿉놀이다. 누가 봤으면 좀 이상하다 생각할만큼 혼자 중얼중얼...내게 일인다역 놀이는 자주있는 일이었다.

이 놀이도 지겨워졌다.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대문 근처에 설치한 아치에 조롱박이 열린 것을 발견했다. 필통 안에 있는 문구칼을 꺼내어 조롱박 바가지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쓱싹쓱싹 문질러봐도 무딘 칼은 조롱박를 가르기 힘들었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눌러썰다 손이 미끄러져 손가락을 깊이 베었다.

피가 뚝뚝 큼지막하게 떨어지며 땅바닥에 동그라미를 점점이 만들었다.

큰일이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당장 도움받을 곳 없으니 나는 침착해야했다. 가방 안에 다행히 구깃한 휴지 몇장이 있어 고마웠다. 손가락을 동여매고 다른 한 손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점심 즈음 하교했는데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싸늘해지는 공기에 몸이 추워졌다. 이 놀이 저 놀이 혼자 하다 지치고 손가락 끝도 칼에 썰려 아려오니 마음도 더욱 심난해졌다. 여섯 식구나 되는데 지금 곁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여태 참았던 눈물이 벌컥 차올랐다.


내가 열쇠도 없이 집도 못 들어가고 있을 거란 거 아실텐데 엄마가 너무 한다 싶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그 생각을 더 이상 누를 수가 없었다. 내 걱정도 안되나.

예정에 없던 약속이 갑자기 생긴걸거야, 열쇠 놓고 가는 걸 진짜 깜빡한걸거야, 그럼 나 올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시겠지.좀 있으면 오시겠지... 생각이 이랬다저랬다 했다.

서러웠다. 나 집 못 들어갈 거 뻔히 알면서 서둘러 오지 않는 엄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완전히 컴컴해지기 직전에 돌아온 엄마는 내가 대문을 열어주는데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동생 손을 잡고 앞서 들어갔다. 일부러 골탕먹으라 한건가 그런 생각이 스쳤다.

집 안에 들어가서야 내 손을 발견했다. 오랜 시간 눌러 싸맸던 휴지가 상처에 들러붙어 힘겹게 떼어냈다. 그것도 아팠지만, 마음은 더 아팠다. 나는 울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행동했다. 왜 그리 늦었냐 묻지도 않았다.

네 살 어린 동생은 딱 그 나이 아이가 그러하듯, 아무것도 모르고 거실을 왔다 갔다 놀고 있었다.



언니들이 돌아왔고, 아빠가 뒤이어 퇴근했다. 이 일은 또 나만의 일로 묻어버렸다.

엄마는 여지껏 단 하루도 나를 기다리지 않았던 거다.

오든 안 오든 혼자 있든 걱정 따윈 없었나 보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사과를 원한다. 엄마는 아마 기억도 못할 일이겠지만, 나는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걸 기억한다. 손가락에서 뚝뚝, 바닥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퍼지던 빨갛고 선명했던 피도, 맘 속에 차올랐던 설움도 잊지 못했다.

이건 분명 엄마의 학대이다. 나는 그런데도 이 날의 진실을, 또 다른 비슷한 어느 날들의 진실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내가 이 가족에 분란을 일으켜선 안된다고, 나만 조용하면 엄마 아빠 또 싸울 일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비밀처럼 되어 버린 이 일들이 내 입에서 나가면 여러 날을 그 매서운 눈초리와 분풀이를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는게 훨씬 싫고 두려웠을거다.



엄마에게 나는, 엄마의 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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