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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백년 Sep 11. 2023

감성적인 멀티버스 : 상실의 아픔을 지나는 방법

영화 <래빗홀>

감성적인 멀티버스 : 상실의 아픔을 지나는 방법

영화 <래빗홀>




출처 : 다음 영화



아직 누군가를 제대로 잃어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아버지가 차례로 돌아가셨던 기억이 다다. 그땐 죽음이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저 그분들을 다신 못 본다는 생각에 조금 슬펐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어차피 주변에 친구들도 많지 않다 보니,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장을 가는 일도 거의 없었고, 친한 친구나 가까운 가족, 친척들은 다행히도 대체로 건강했다. 성인이 되고 장례식장에 가본 것도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었다. 여전히 장례식장이 낯설고 장례예절도 잘 모르겠고 죽음에 따른 상실의 경험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이 많으니, 그런 경험으로 죽음을 짐작할 뿐이다. 어차피 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이니, 멀어짐의 상실도 죽음의 상실에 어느 정도 견주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죽음의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앞으로 내 앞에 남은 죽음이 창창할 것이며, 점점 더 죽음은 가까워지고 늘어나기만 할 텐데 매번 그 상실을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오지도 않은 미래를 언제나 걱정한다. 결국 산 사람은 산다는 말이 있지만, 과연 나도 그렇게 결국 살아질까. 죽음의 경험치가 적은 탓에 죽음에 따른 상실의 아픔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안 된다. 나는 작은 일에도 마음을 크게 다치곤 한다. 남들에겐 별 것 아닌 일에도 속앓이가 심한 편이고. 마음의 맷집이 약한 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내가 과연 상실의 아픔이 찾아왔을 때 이겨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겨내야 할까.


출처 : 다음 영화



영화 <래빗홀>은 이러한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죽음에 의한 상실을 겪은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의 아픔을 겪고, 외면하고, 대면하고, 극복해나간다. 주인공 부부는 끔찍한 차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었다. 남편은 여전히 아들과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과거를 쫓지만, 아내는 아들의 물건을 모두 버리고 없었던 일처럼 외면한다. 슬픔 따윈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그저 살아간다. 각자 상실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아내는 아들을 차로 치여 죽인 가해자 소년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불운한 사고로 죄책감에 시달리던 소년은 죽은 아이에게 바치는 만화를 그리고, 아내에게 보여준다.




소년의 만화 속 평행우주에는 한 가족이 등장하고, 다양한 세계에 존재하는 그들의 다양한 모습이 등장한다. 어떤 세계에선 온 가족이 행복하고, 어떤 세계에선 부부가 서로 싸워서 등을 돌리고, 어떤 세계에선 아빠가 일찍 죽고, 또 어떤 세계에선 소년이 죽어서 없기도 하다. 또 어떤 세계에선 엄마가 없고, 어떤 세계에선 부부가 모두 없고 소년 혼자 존재하기도 한다. 영화 속 아내는 소년의 만화를 보며 깨닫는다.


”그럼 이건 그냥 우리의 슬픈 버전인 거구나. 그곳에서의 나는 행복할 수도 있겠구나.“


출처 : 다음 영화



나도 종종 다른 버전의 나를 꿈꿨다. 지금의 내가 불운하다고 느낄 때마다 자꾸 떠나가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워 질 때마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다른 버전의 나였다면 그렇게 그들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래빗홀>을 통해 단순히 다른 버전의 나에서 다른 우주의 나로 뻗어나갔다. 아주 먼 어느 우주의 나는 지금처럼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상실의 아픔도 겪지 않고 그렇게 살아갈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우주의 내가 있을까. 그곳에선 지금보다 덜 서글플까.

최근 멀티버스로 호평을 받은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같은 결의 이야기였다. 초라한 현실의 주인공이 수많은 멀티버스 속 본인이 가진 다양한 힘을 끌어와 세상과 가족을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영화인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또 한번 희망을 얻었었다. 그리고 래빗홀의 아내처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곳에서의 나는 행복할 수도 있겠다고. 지금 이 세계의 내가 수많은 나 중 최악의 버전이라고 해도, 어디에선가 내가 꿈꾸던 것 이상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또 어디엔가는 지금의 나를 부러워하는 나보다 더 최악의 내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출처 : 다음 영화



‘또 다른 우주의 행복한 나’라는 존재가 상실의 아픔을 완벽하게 치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어디에선가 살아 숨쉴 잃어버린 이들을 떠올린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선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여전히 곁에 계실 수도 있겠지. 연락이 끊어진 누군가가 아직도 나와 함께 마음을 나눌지도 모를 일이며, 내가 외면하고 포기한 꿈을 이뤘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게 희망을 가지고 안도하며 결국 살아가야 한다고, <래빗홀>은 이야기한다. 나아가야 한다고.



출처 : 다음 영화



그럼에도 여전히 상실의 아픔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막막한 이들을 위해, 영화는 아주 세심하고 다정하게 그 방법을 알려준다. 사실 이겨내는 건 아니다. 그냥 상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그들은 이야기한다. 일단 살아가라고. 살아가면 곧 그 크기는 작아지고 언젠가 견딜만해진다고. 공기처럼 햇살처럼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 않을 뿐 항상 우리 곁을 맴도는 모든 것들처럼, 그저 주머니 속 조약돌처럼 잊고 살아가다가 가끔 꺼내보고 다시 집어넣어두면 된다고. 그저 그렇게 상실을 안고 살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언제부터인가 견딜 만해져. 결국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작은 조약돌만하게 되지.
그건 아들 대신 네게 주어진 무엇, 그냥 평생 가슴에 품고 가야 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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