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썽 Oct 20. 2023

벽골제 언덕 위에서

한때

한때 벽골제 남쪽이 저수지였다고도 하고, 바다였다고도 한다.

너무 오래된 옛날이야기이기도 하고, 둑길 위에 서서 보는 사방의 풍경이 너무 확신에 찬 논뿐이라 저수지든 바다든 설화 속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뭍이 아니라 물이었다면 훨씬 아름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여름과 가을 사이

아마 추석즈음이었을 것이다.

아이들과 벽골제로 산책을 갔던 15년도 더 된 사진을 발견했다.

한때였던 순간.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면 그 순간의 기분과 기온이 고스란히 저장된다.

그날은 아직 여름이 가시지 않아 햇볕이 따뜻했고, 들판엔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춥기도 하고 뜨겁기도 했던 날이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와 억새가 바람에 함께 흔들렸던 평화로운 오후가 그대로 재생된다. 그림에 코스모스를 그려 넣을 걸 그랬다.

삼십 대 청년이었던 바람머리  남편은 흰머리 지긋한 오십 대 아저씨가 되었고,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니던 꼬마들은 나만큼 자랐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 엊그제 기억처럼 선명한 청량한 가을날의 추억을 소환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날의 바람소리도 들리고, 두 꼬마들이 바람을 가르며 재잘거리던 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사진에는 추억이 저장되어 있고, 그림은 추억을 따뜻하게 담아주는 그릇 같다.

나의 삼십 대 한때이기도 한 그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