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J! 여기야!”
모스크바 시장 한복판에서 약속 장소를 찾아 일가족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짝꿍을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이가 있습니다. 덩치가 크고 사람 좋은 인상을 풍기는 이 러시아인 K는 남편과 오래간만이라고 포옹하며 러시아식 볼키스 인사를 나눕니다.
“이 사람이 내 아내 그리고 두 딸이야”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눕니다. “도브리 젠(좋은 오후). 얘기 많이 들었어요.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워요. 이 쪽입니다.”
남편과 K는 오랜 친구 만난 것 마냥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 다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 둘은 국적으로 따지면 영국 남자와 러시아 남자입니다.
시장통 어느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작은 문이 나오고 뒤따라 2층에 올라보니 K와 비슷한 인상의 한 여인 Y가 서 있어요. “안녕 J! 다시 왔구나!” 만남 전 K와 Y 두 사람이 부부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어쩜 이리 인상이 비슷한지 사전 지식이 없었으면 남매지간인 줄 알았을 것 같습니다.
이들이 소개한 이 구석진 음식점은 러시아 전통 바비큐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벽난로에서는 모닥불 타는 소리가 들리고, 이미 자리한 사람들이 기분 좋게 얘기하며 바비큐를 즐기고 있습니다. 어린 두 딸아이들이 있으니 조금 구석진 조용한 자리를 찾아 앉습니다. 내가 나를 소개하지 않아도 이미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Y는 살갑게 얘기를 걸어옵니다. 시베리아 열차 여행은 어땠는지, 어느 지역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등등. 그래도 2주간 여행했다고 공통으로 나눌 수 있는 주제가 있음이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메뉴판을 받아 드는데, 사진들이 있지만 무엇이 무슨 고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럴 때는 호스트에게 주문을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K는 이러저러 우리의 취향을 묻더니 점원에게 주문을 하는데, 느낌상 절대 양이 부족할리 없어 보입니다. 나오는 음식을 보니 남은 음식 싸서 가게 생겼습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남편은 일을 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합니다. 아무리 월드컵이고 그 기사를 쓰러 가는 기자라 신분이 증명될지라도 국적이 영국인 사람이 러시아 방문 비자를 받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렸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편은 축구 경기 따라 그 넓은 러시아 땅을 쫓아다니느라 취재 업무와 더불어 이동하는 여행 시간이 많아 힘들었고, 나는 어린 두 딸 전담 케어를 하며 하루 종일 아이들 뒷 꽁무니 쫓아다니기 바쁜 나날이었지요. 어느 날 남편이 영상 통화에서 “너도 여기 데려와보고 싶어” 그럽니다. 일상에 종종거리고 있다가 그 말 들으니 얼마나 큰 에너지를 얻던지요. 러시아에 가보고 싶다기보다는 좋은 거 보면 내 생각이 난다 하니 그 짝꿍의 말이 그저 제 자리서 열심히 사는 우리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러시아 월드컵 막바지, 남편은 긴 여행을 마치고 수도 모스크바로 돌아옵니다. 아마도 준결승과 결승 단 두 경기만 남은 상황이라 그간 지치기도 했었겠지요. 지내던 숙소에서 벗어나 혼자 조용히 어느 선술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걸더래요. 그 사람들이 K와 Y였습니다. 남편은 모스크바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영국 사람이고, 그들의 공통 관심사 축구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축구 관련 업계 사람이 아닌 지역 주민을 만나니 관심도 더 생기고 좋았다고 하더군요. 이들은 그날 정말 즐거웠었나 봅니다. 연락처도 나누고 출국하기 전에 한번 더 만났다고 합니다. 다시 보자 인사도 나누고 말이지요. 큰 국제 경기 때문에 들어온 외국인에게 친절한 지역 주민과의 만남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다음 해인 2019년, 우리는 살던 말레이시아를 떠나 남편의 나라 영국으로 이사를 가기로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이민 방법을 러시아를 관통해서 가면 어떨까 제안합니다. 연애할 때 호기 좋게 대륙 횡단 여행 해보자고 얘기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어린 두 딸이 있는데 말이지요. 이사를 하려면 원래도 복잡한 일이 많은데, 부창부수 하자는 대로 따라 합니다. 남편의 영국 여권은 러시아 방문 비자를 받는데 다시 돈과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대한민국 여권 소지자는 러시아 무비자 입국이 가능했습니다. 비자가 쉽게 해결되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해외에 나와보면 “Are you from the North or the South?”가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지요. K와 Y는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음은 러시아 보트카(Vodka) 얘기입니다. 호텔에서 보드카 앤 토닉 주문했을 때 떨떠름했던 바텐더의 반응을 얘기하니, 그 사람 말이 맞답니다. 보드카는 순수한 그 자체 샷(shot)으로 마셔야지 뭘 섞는 순간 이미 그 퀄리티를 망친 것이라면서 말이지요. 음식점에서 배불리 먹고 나니 자기들 집으로 가잡니다. 가는 길에 상점에서 좋은 보드카 고르는 방법도 가르쳐 주겠답니다.
따라가 보니 이들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 있는 시영아파트 느낌입니다. 연식이 오래되었지만 교통이 좋은 모스크바 중심이었고 아파트 단지 안에 공원 같은 공용 녹지와 아이들 놀이 시설이 있었습니다. K와 Y는 야외용 탁자와 의자 그리고 커다란 아이스박스 안에 맥주며 보드카, 아이들 음료까지 준비를 많이 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바야흐로 5월 완연한 봄날이었고, 보드카와 러시아 맥주를 벗 삼아 우리는 금방 친숙해집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에 K와 Y에게 사람들이 와서 인사를 합니다. 놀이터 옆이었으니 대부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온 이웃 주민들이었습니다. K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자신의 손님으로 인사시킵니다. 영국 그리고 축구 두 키워드에 러시아 청소년 아이 몇몇이 남편 J와 K에게 모입니다. “이번 월드컵을 어떻게 보느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이다”, “찰스 왕세자가 왕이 될 것으로 보느냐” 등등 금방 우리의 저녁은 동네 모임으로 확대됩니다.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다 보니 어린 딸들도 엉덩이가 들썩입니다.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서로 말도 통하지 않지만 아이들만의 몸 언어로 금방 같이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Y와 나는 멀지 감치 이동식 의자에 앉아 이들의 모습을 보는데 '행복하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Y도 그런 마음이라며 웃습니다. Y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부부 사이에 아이를 갖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결혼하면 아이는 당연히 생기는 줄 알았지요. 저도 첫 아이가 마음먹은 대로 생기지 않아 마음 졸였던 시간이 있었기에 Y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밤이 깊어가고 이제 동네 주민들도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한 친구가 “우리 사진 같이 찍어요” 그럽니다. 아무래도 이 청소년들도 재미있는 시간이었었나 봅니다.
“친구들, 다음에는 우리 영국에서 만나자!” 했더니 K가 “J, 이번처럼 네가 다시 와!” 그럽니다. 러시아 사람이 영국 비자받는 것은 힘들다고요. 비자를 받더라도 그 비용이 꽤 비싸다고 합니다. 다음에는 모스크바 근교 자신들의 별장에서 만나자고 지킬 수도 있지만 쉽지 않은 약속을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2023년 지금 러시아는 전시 상황입니다.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때려 시작된 전쟁이니 명분도 당당하지 않지요. 하지만 이는 정치 권력자들의 싸움일 뿐, 일반 시민들은 어느 나라나 같았습니다. 하루하루 출퇴근 시간에 쫓기고, 직장 스트레스를 이겨가며 열심히 일하고, 지역 주민들끼리 친하게 지내며 마음을 나누고, 어린아이들은 놀이터에 나와 세상 제일 행복한 얼굴로 같이 어울려 놀고... 이런 평범한 일상들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전쟁과 같은 파괴의 시간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에 남편은 그들과 문자를 나눴습니다. K와 Y는 어서 이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혹시나 걱정이 되어서 수도 모스크바를 떠나 장모님이 사시는 근교 시골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말이지요. 아마 예전에 말했던 그들의 별장을 말하나 봅니다. 모스크바 한복판 아파트에 사는 이유가 통근이 쉬워서라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개인사에도 변화가 있는 듯합니다.
2019년 그날처럼 러시아 친구들 K, Y와 함께 따뜻한 저녁 나눌 수 있는 날이 곧 다시 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