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나비효과
사회 초년생 시절의 일이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우리 부서의 팀장님을 모시고 현장 영업인력들에게 나눠 줄 선물세트를 사러 마트에 간 적이 있다.
내가 혼자 가서 사 온다는 것을 팀장님은 우리 팀에서 제일 한가한 본인과 막내인 내가 같이 가서 사 와야 한다면서 따라나섰고, 그렇게 조그마한 내차의 보조석에 팀장님을 태우고 마트로 이동하게 되었다.
팀장님은 평소에 장난기가 넘치고 유머감각이 있으셔서 가끔 허술해 보일 때도 있는 분이었지만, 진지할 때는 진지하고, 특히나 업무에 프로셨고, 가끔 이럴 때는 나를 챙겨주는 어른 같다는 느낌을 받는 분이었다.
마트에 도착해서 주차자리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후진을 하며 빈 주차칸에 차를 대려는데, 쇼핑카트에 선물세트를 가득 쌓고 지나가던 마트직원이 주차하는 내가 안보였는지 차가 후진하는 방향 뒤쪽으로 카트를 밀어 넣어 '퉁'하고 소리를 내면서 카트와 차가 부딪혔다.
부랴부랴 차 밖으로 나가서 살펴보니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마트 직원인 여성분이 적지 않게 당황해했었고, 차에 상처라도 났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
차를 확인해 보니 뒤쪽에 작은 스크래치가 생겼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어머니 뻘 되시는 분이 명절 직전까지 이렇게 어렵게 일하신다는 안쓰러운 생각도 들어서 그분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얘기했다.
"차에 자국이 좀 남긴 했지만 괜찮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네... 네~"라고 그 마트직원 분은 말하더니
별 다른 말도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팀장님이 나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함부로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니다."
평소에 존경하던 팀장님의 말씀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보험을 부르거나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확고했기에 이런 식으로 가벼운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어른스러운 행동이라고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분명 저 마트직원분도 오늘은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저녁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어디 어디 경찰서인데요 뺑소니로 신고가 들어와서 서에 한번 와주셔야겠습니다."
갑자기 가슴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한대 얻어맞은 느낌과 함께...
마음이 불안해졌고, 무언가 이상하게 어그러졌다는 느낌만 가득했다.
다음날 팀장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경찰서에 다녀와야 한다는 얘기를 했더니 팀장님이 '너 그럴 줄 알았다'라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같이 가자고 말씀하셨다.
사고당시 옆자리에 앉아있던 팀장님이 증인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좀 가벼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경찰서로 향했다.
전날에 전화로 경찰서 담당자분께 사정을 얘기하고 마트의 CCTV를 확보해 달라고 요청을 했었는데, 경찰서로 가는 길에 경찰서에서 해당 CCTV가 확보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두 번째로 경찰서라는 곳을 갔다.
정직하게 살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 내 삶의 모토라서, 나 스스로도 법 없이도 살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며 살았었는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경찰서로 또다시 향하게 되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첫 번째는 대학생 때 다음 아고라에 글을 쓰다가 악플을 일삼는 스마일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댓글부대의 일원을 내가 조롱했었는데, 어처구니없게 그 사람이 실제로 모 당의 지역의원이어서 그 사람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경찰서에 한번 간 적이 있다. )
경찰서에 도착해서 담당 경찰관분을 만나니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웃으셨다. 그리고 어제 일어난 고소 정황에 대하여 차분히 설명을 해주셨다.
어떤 나이 지긋한 여자분과 그분의 남편분이 오셔서 마트에서 뺑소니를 당했다고 하면서 육체적으로 큰 피해를 받았고 그 충격으로 머리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담당 경찰관이 의아해서 머리에 이상이 있으신데 지금 보기에는 멀쩡해 보인 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서 그 여성분이 경찰서 바닥에 드러누워서 죽을 것 같다면서 난리를 쳤다고 한다.
그리고 확보한 CCTV를 같이 봤다. 내가 차량을 천천히 후진하고 있는데 그 마트 직원 여성분이 바로 옆에서 그걸 지켜보다가 갑자기 쇼핑카트를 차량 뒤로 집어넣었던 게 명확하게 보였고(어이가 없었다.), 당연히 그 여성분은 충격도 아무것도 없어서 그 자리에서 멀쩡하게 멀뚱멀뚱 서있는 모습이 해당 카메라에 다 찍혀있었다.
CCTV를 같이 본 후 담당 경찰관은 웃으면서 사실관계가 명확해 보인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단히 조서를 작성한 후에 이제 들어가 보셔도 좋다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경찰서를 나와서 돌아가는 길에 팀장님이 다시 나에게 조용히 얘기했다.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쓸데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회라면, 그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는 호의를 권리라고 생각하게 돼. 어제 네가 한 행동은 호의였지만 그 사람에게는 더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버린 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호의를 베푸는 거 아니다. 너와는 다른 사람들이야~"
팀장님의 말들을 혼자 곱씹어보면서 마음이 아려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호의를 베풀지 말아라...' '너와는 다른 사람들이야...'
가슴 한편은 먹먹해졌지만 팀장님의 말들은 '어른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경찰은 해당 사건을 무혐의 내용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그렇게 사건이 종결되었다.
팀장님이 그 사람들을 무고죄로 고소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오죽 못났으면 그랬을까?'라는 생각도 했었고,
그 사람들의 삶에서도 어떻게든 숨실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고소 따위 없이도 스스로 반성하길 바랐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뒤에 또 웃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근로복지공단에서 나에게 800만원 가량을 구상청구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그 내용은 1년 전에 마트에서 내가 차로 사람을 쳤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일을 하지 못했고, 그것에 대해 급여 등 지급이 되었던 것을 나한테 모두 청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없는 시간을 쪼개어 검찰청에 직접 가서 해당 사건의 무혐의 종결처분내용을 받아서 근로복지공단에 보냈고, 근로복지공단 담당직원은 그 내용을 보고 당황했다.
나는 그 담당 직원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이 정도도 확인 안 하고 돈을 내주는 게 맞냐며 역정을 냈다.
정말 그랬다. 나는 회사에서 법인카드를 쓸 때도 나 개인을 위한 돈은 일절 쓰지도 않고 그렇게 조금이라도 연관되지 않을까 늘 조심한다. 하물며 민간기업의 직원도 회사의 작은 돈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노력을 이토록 하는데, 나라의 돈이 공단 직원의 안일함으로 이런 식으로 쉽게 빠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때는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이 직원이 나와 같았다면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마트사건 후 1년 뒤의 해프닝은 근로복지공단의 사과로 다시금 종결이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6개월 뒤에 또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아파트 관리자 측에서 나에게 경찰서에서 출석명령이 왔다고 우리 집에 직접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해당 내용을 봤더니 내가 사기죄의 피의자가 되어서 나를 조사하겠다고 경찰서에서 호출을 한 것이었다.
해당 서면을 받아서 내용을 자세히 보니 어느 날 어느 시에 내가 잠실의 어디에서 사기를 쳤다고 명시가 되어있었다.
나는 또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해당 날짜의 나의 행적들을 따지기 시작했고, 신용카드 내역 중에서 해당날짜의 해당시간에 내가 양재동의 미용실에서 커트와 염색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한 것은, 나를 호출한 그 경찰서가 이전에 마트사건 때문에 내가 출석했던 바로 그 경찰서 라는것...
다음날 나는 경찰서의 담당 경찰관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따지기 시작했다. 나를 지목한 게 맞냐? 증거가 있냐? 난 그때 양재동에 있었다. 등등을 얘기를 했고, 담당 경찰관은 잠시 확인해 본다 하더니 착오가 있어서 피의자를 잘못 특정했다면서 연거푸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를 했다.
알고 보니 내가 마트사건 때 가서 적었던 내 신상에 관련된 정보가, 어처구니없게 사기죄 서류들에 섞여 들어가게 되었고, 해당경찰관은 아무 의심 없이 나를 사기죄의 피의자로 보고 출석명령을 한 것이었다.
어떻게 내 신상정보가 그런 범죄자들의 정보에 섞일 수가 있는지, 그렇게 꼼꼼하지 못한 나조차도 일하면서 절대로 하지 못할 실수를 그 경찰관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화가 났다.
그렇게 이번사건도 또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이미 아파트 관리인은 아마도 아직도 나를 사기죄의 피의자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나가다 마주처도 갑자기 그 말을 꺼내는 게 너무 웃긴 거 같아 계속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 가지의 조그마한 일이 전혀 다른 거대한 결과를 만들었을 때 쓰이는 말이다.
1. 나는 내 차에 물피 사고를 낸 마트 직원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2. 그 마트직원의 뺑소니 신고로 나는 경찰서에 가서 해명을 하고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고
3. 1년 뒤 근로복지공단에서 그 마트직원에게 지급된 800만원의 구상청구가 나에게 도착했고, 또 그 사건을 해명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냈고
4. 그로부터 6개월 뒤에는 그 경찰서에 있던 나의 신상자료가 사기꾼 피의자 자료에 잘못 섞여 들어가 또 경찰서로 호출을 받았고,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나의 자그마한 호의 하나가 나의 3년을 힘들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으니 인생이 참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도 들고, 좋은 의도로 어떤 일을 하고도 나쁜 사건으로만 파생되는 이 나비효과가 나에게 좀 가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신이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해봤다.
그 마트직원이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그 근로복지공단의 직원이 공적인 돈이 나가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경찰관이 내 신상자료 따위의 중요자료를 아무 데나 두지 않고 잘 챙겼었다면,
이 세 가지 일들이 다 내가 당사자였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은 나도 아니고, 나와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었기에 내가 그 일들의 피해자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이 나와 같다면 다툼도 어려움도 나쁜 것도 힘든 일도 없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내가
'세상은 조금도 나와 같지 않다.'라는 숨겨졌던 진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떠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면
내 작은 행동으로도 거대한 파급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나와 같다면'
'세상의 생각들이 내 생각과 같다면'
'세상 사람들이 호의를 호의로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리고
'세상은 나와 같지 않다'라는 정의를 마음에 새기는 나를 두고
스스로 '어른스럽다' 여기는 지금의 내 모습
이런 것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기분이 씁쓸해지는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