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수편의 글을 통해 나는 남편을 고발했다.
그러나 내가 썼지만 나의 이야기는 쏙 빠졌다.
그래서 남편만 나쁜 사람이 되었다.
남편의 눈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늘 궁금하다.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글을 시작하면서 생각했다.
글을 마칠 때쯤 되면 우리 관계에 뭔가 변화가 있을까.
나는 남편이 돈을 제대로 주지 않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벌어졌고, 돈만 제대로 준다면 이렇게 싸울 일도, 오해할 일도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최근에 내 상한 마음의 원인이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동안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만일 이혼을 한다면...이라는 가정을 하면 항상 마음이 한쪽이 무거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남편이 없는 집이 편한것도 사실이다.
가끔 문상가느라 못들어 오는 날은 마치 휴가라도 얻은 것처럼 기분이 좋다 못해 들뜬다.
남편이 퇴근하고 들어오면 내 기분이 가라앉고 짜증이 나는 날도 있다.
집안의 분위기는 대부분 아내기분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다보니 내기분이 안좋으면 딸도 기분이 안좋다고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은 나와 남편뿐 아니라 함께 사는 딸의 정신건강에도 좋지 않다.
그래서 이혼?
말도 안된다.
그러니 오해라면 풀어야 하고 이해받아야 할 일은 이해받고, 용납해야 한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라 피하고 싶지만 남편과 대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남편은 퇴근하면 바로 들어오지 않는다.
아파트 주차장에 파킹해 놓고 차 안에서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다가 내가 운동하러 나가고 나면 그때 들어온다.
가끔 내가 좀 늦게 운동하러 나가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오늘은 남편이 있는 주차장으로 그를 만나러(?) 나갔다.
집을 나서기전 기도했다.
분노버튼이 눌러지면 나 스스로도 감정이 주체할 수 없기에 먼저 내 감정을 다스려 달라고...
온전히 맡기겠으니 내 마음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그리고 남편의 마음을 열어달라고...
마지막으로 만약 지금이 화해의 때가 아니면 남편 차가 그 자리에 없기를 기도했다.
변함없이 남편은 차 안에 있었다.
운전석 옆에서 서서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남편이 깜짝 놀라서 돌아 봤다.
"옆에 타도 돼?"
남편이 주섬주섬 옆자리를 정리했다.
내가 앉자마자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나에게 돈을 꺼내줬다.
한참 전부터 주기로 약속한 돈이다.
계속 생활비를 주지 못한 이유가 따로 계를 들어서라고 했고, 그걸 이번에 타니 주겠다고 한 거다.
(요즘도 계를 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금액은 약속한 액수에서 절반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약속을 지켰다.
남편이 변명을 했다.
지인이 선물옵션에 투자하라고 해서 했다가 400만 원을 잃었다고 했다.
한심했지만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귀가 얇아?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신혼 때 오빠랑 형부랑 다단계 하면서 당신을 그렇게 꼬셔대도 안 넘어가던 사람이..."
남편이 내 말에 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을 한다고 했다.
"제발 버럭 화부터 내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내가 말하면 그 말에 너는 더 화를 내니까"
남편말을 부정할 수 없다. 다 맞는 말이니까.
"그때는 내가 감정이 꼭대기에 있을 때니까 그렇고 지금은 아니니까 말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기도하면서 '나는 없다'라고 부인한 상태라 감정의 동요는 없다.
"넌 나랑 싸우면 자꾸 나가라고 하잖아.
근데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들었어.
정말 내가 일도 못하게 되면 집에서 버려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럼 나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 거 같아서 아는 사람이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면서 나한테도 해보라길래 한 거야.
근데 다 잃었지.
그러고 나서 다신 안 하기로 했어"
이렇게 이실직고하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고 반성까지 하니 더더욱 덮어줘야 할 일이다.
물론 남편 말이 100%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여부가 오늘 대화의 본질은 아니다.
주식으로 폭망 한다는 걸 깨달은 걸로 치면 교육비 400만 원은 싸지...
앞으로 정말 정신 차리고 나에게 잘하겠다며 진심을 다해 말했다.
이런 고백은 처음이 아니다.
그때마다 의심을 하면서도 그 말을 믿었던 것은 돈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오직 돈에 대한...
말을 하는 그 순간에 남편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의지 박약이고,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보다 자기가 즐기는 술자리와 노름방의 유혹이 훨씬 더 큰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남편의 잘못은 누가 들어도 잘못한 게 맞다.
반대로 나는 지능적인 사람이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죄가 무죄임을 설득할 수 있다.
내 잘못이 드러나지 않게 잘 포장하는 기술이 있다.
남편은 10여분 정도 나랑 얘기하면서
"내가 잘못한 게 많으니까"
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기껏해야
"나도 그래"
라는 말로 가볍게 넘기면서 석고대죄하는 표정으로 말하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나야말로 하나님의 '덮어주심'이 없었더라면 일만 달란트 빚진 것이 고스란히 드러날 죄인이다.
100 데나리온의 죄에 무거운 죄책감을 갖는 남편을 책망할 자격이 있을까.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이미지는 '생활력 강한 실질적 가장'으로 각인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남편은 도박, 술, 바람등으로 버는 돈을 거의 탕진한 무책임한 가장이다.
그러나 나를 남편처럼 낱낱이 고발한다면 오히려 남편이 불쌍한 피해자가 될수도 있다.
나는 매일 속아도 또 다음날이 되면 믿고 싶다.
믿어지지 않지만 믿고 싶다.
이것은 남편 사랑이 아니고 돈사랑일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정.
가정을 훼손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예전엔 이혼 안 하는 엄마가 정말 이해가 안 됐어.
왜 그러면서까지 사는지...
근데 지금은 고마운 마음이 커.
엄마.
가정을 지켜줘서 고마워"
요즘 가끔 딸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올해로 딸은 서른넷이 됐다.
벌써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딸은 아직 모태솔로다.
부부싸움을 많이 보여준 내 탓일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탓이라기 보다 아직 짝을 못 만났을 뿐이라는 것에 무게를 싣는다.
그러고 싶다.
"내가 아빠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아빠가 집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우울할 것 같아.
투닥거리며 싸우더라도 엄마랑 아빠가 있는 평범한 집이 요즘 정말 감사해.
아빠 때문에 고생한 엄마를 보면서 힘든 때도 많았지만 이렇게 건강한 가정이 될 때까지 인내한 엄마가 정말 존경스러워."
영원히 평행선위를 걸을 것 같던 남편과는 요즘 가끔 맞을 때가 있다.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남편을 다 알수는 없으나 한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다.
좌로 가라면 우로 갈정도로 내 말이라면 지겹게도 안듣던 남편이 내 말을 듣는다.
듣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말을 하면서도 이건 틀린말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는데 그때조차 남편은 내말이 맞다고 한다.
딸은 내가 달라져서 아빠가 변한거라고 말을 해준다.
나도 안다.
남편들은 단순해서 아내가 조금만 달라져도 그들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딸이 없으면 남편과 한집에 있는 게 불편했던 내가 요즘은 딸을 독립시킬 계획을 하고 있다.
남편과 둘만 남아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이제 진정한 동료애(?)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