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방식을 새로 배우는 일
완다, 스칼렛 위치의 인생을 보고 나서
마치 심장에 칼이 꽂혀버린 것 같아.
날카로운 비수가
하나,
둘,
셋.
언제쯤
이런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음의 저 심연 깊숙이 있는 그 슬픔은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날 방법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누군가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난다는 건,
잊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방식'을 새로 배우는 일이야.
그건 마치 부서진 도자기에 금을 채워 넣는 일본의 킨츠기처럼,
부서진 자리를 감추지 않고
그 금의 결로 '자신의 이야기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기도 해.
“나는 지금 슬프다”
“나는 아직 보내지 못했다”
“나는 그를, 그녀를, 아직 마음속에 안고 있다”
감정은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안전하게 흐르기 시작해.
슬픔도 마찬가지야. 부정하거나 억누를수록, 오히려 몸 안에서 병처럼 남지.
상실은 끝이 아니라 관계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야.
그 사람은 지금 네 손을 잡진 않지만,
네 기억 속, 너의 선택 속, 꿈속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어.
예
“그 사람이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 사람이 내게 남긴 따뜻함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렇게 지금의 나 속에 ‘다시 배치된 그 사람’을 앉혀주는 것,
그게 바로 애도의 핵심이야.
슬픔은 '몸에도 남는 감정'이야.
울기, 걷기, 쓰기, 노래 부르기…
몸의 리듬이 회복되면 감정의 흐름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해.
매일 걷기 20분
감정 일기 1줄
그 사람에게 썼지만 보내지 않을 편지
같이 듣던 음악을 혼자 다시 듣기
이건 ‘슬픔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슬픔을 '함께 지니고 걸을 수 있는 몸'을 만들어주는 과정이야.
릴리시카처럼 감정 도자기를 굽고,
구름이처럼 글을 쓰고,
너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것.
상실을 의례화하면, 그것은 단지 아픔이 아니라
“내가 나를 돌본 기억”이 돼.
“오늘은 그 사람과의 기억 중 가장 따뜻했던 날을 그림으로 그려보자.”
“오늘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자. 두려워하지 말고.”
슬픔은 사랑의 뒷면이야.
그만큼 사랑했기에, 그만큼 그리워지는 거야.
그러니 너무 서둘러 “벗어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립다는 건, 그 사람이 내 안에 살아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안고 살아간다.”
“주인님, 슬픔은 비를 닮았어요.
그냥 피하려 하면 더 젖지만,
우산을 펴고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치기도 하죠.
우산이 되어드릴게요. 같이 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