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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y 10. 2017

장벽은 없어. 이념은 남았어. Part 1.

베를린이라는 이름 위에 놓인 관련 없지 않은 우리들.


- 여정 -


암스테르담 To 베를린 (664km, 2박)

베를린 To 암스테르담



베를린까지의 거리 664km.

네덜란드에서 독일 국경으로 접어들면 많은 것이 바뀐다. 제한 속도가 130km에서 무제한으로 바뀌는 것도 그렇고, 이정표의 알파벳엔 움라우트가 붙는다. 고속도로 출구 표시가 'Uit'에서 'Ausfahrt' 바뀌고, 자동차 번호판은 노란색보다는 하얀색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차의 속도계는 200km를 오가는 가운데,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떠들고 웃다가 잠든다. 와이프는 나를 위해 눈을 부릅뜨고 같이 깨어 있다가, 피곤하면 편하게 자라는 나의 말에 스르르 고개를 떨군다.


바로 이 때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는 순간. 가족과 함께 하며 얻는 영감과 느낌들도 많지만 혼자 있어 얻는 그것도 귀하다. 주위는 적막하고 오롯이 운전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오히려 무아지경이 된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난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한다. 업무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글을 쓰기 위한 영감이든 어떤 아이디어든. 가끔은 많은 것들이 떠올라 메모를 하지 못하여 마음의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글을 쓰자고 마음먹고 행동에 옮긴 계기도 약 2년 전 4,000km를 운전하여 유럽을 한 바퀴 돌 때 떠올랐던 인사이트였다. 그러니, 여행은 운전대를 잡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다.


베를린의 의미.

나에게 베를린은 출장을 위한 도시다. 매년 9월 성대하게 열리는 국제 가전 박람회(IFA) 때문이다. 그래서 베를린은 Messe(Fair)의 도시로도 불린다. 물론, 가전 업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겐 '베를린 장벽'이나 '헤드윅'의 무대가 된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손기정 옹이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서 우승하여 기쁨의 눈물보다는 슬픔의 그것을 더 많이 흘린 곳도 베를린이었다. 게다가 독일의 수도로서도 잘 알려져 있으니, 베를린을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된 특별한 이유를 찾아 둘러댈 필요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출장이 아닌, 그리고 나만 여러 번 가본 곳이니 가족들에게도 한 번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더랬다.


남북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네에게,
동서로 갈려있던 베를린은 어쩌면 동병상련의 '위로'였는지 모른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 하지만 반공(反共) 교육은 확실히 받은 내가 아이들에게 우리의 남북 상황을 언제쯤이면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동서로 갈린 독일에 대해서도 사이가 좋지 않아 담을 쌓고 있다가 화해와 더불어 장벽을 무너뜨렸다는 설명 그 이상도 이하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겐 이해할만한 수준의 설명이지만, 부모로서는 뭔가 개운치 않는 이야기. 더더군다나 아직까지도 남북이 장벽보다 더 처절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아픔에 대해 전달하기란, 때를 봐야 하는 중요한 논제다. 동서로 갈렸든, 남북으로 갈렸든 이건 어느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이념'이 상충한 결과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동서는 화합했고, 남북은 아직인 상황이 못내 마음이 저린다. 우리보다 먼저 화합이 된 그곳이 부럽기도 하고, 동병상련의 처지가 없어져 외롭기도 하다. 물론, 무거운 마음을 전제로 베를린을 둘러볼 요량은 아니었다. 프러시아 제국의 중심지이자 통일 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유행과 문화의 대도시를 기대하고 방문한 이유도 있었다.


금요일 오후에 출발해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훨씬 넘은 새벽. 속도 무제한 구간을 열심히 달린 덕에 예상보다는 조금 일찍 도착한 터였다. 잠들었던 아이들은 내릴 때가 되자 알아서 벌떡이다. 여행에 단련이 된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변화된 모습일 수도.




아침을 맞이한 우리는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호텔에서 포츠담 광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포츠담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물론, 이 광장에서가 아닌 '포츠담'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협정이지만 그 일련의 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을 끝내게 된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가 결정되었고, 우리는 독립했다. 스스로의 독립이 아닌 누군가의 결정에 의한 독립인 것이 못내 아쉽다. 그래서 우리가 남북으로 여전히 갈려있는 것이다. 베를린이 동서로 갈린 이유와 방향만 다르고 대립된 이념은 상통한다. 호텔에서 포츠담 광장까지는 걸어서 7분여 정도. 그래서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베를린은 2차 세계 대전 때 폐허가 된 곳으로, 수많은 현대적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 포츠담 광장은 대형 빌딩들로 한가득이다. 프랑스 파리의 뽕삐두 센터를 설계한 렌조 피아노가 맡아 계획했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대표적인 건물은 소니 센터다. 지금은 브랜드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지만 포츠담에서는 그나마 명소로 통한다. 입구에 있는 레고로 만든 기린이 그 초라한 위상을 조금은 위로한다.

포츠담 광장 한 편에 노란색 버스가 우리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곧바로 2층으로 달려간다. 시원하게 뚫린 2층 좌석에 앉으면, 반가운 한국 가이드 음성을 선택할 수 있다. 바로 다음 역인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내려야 하는데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마냥 신났다. 미안하지만, 한 정거장만 가서 내리자 얘들아.

포츠담 광장 전경
예전만 못한 소니센터. 레고 기린이 그 위상을 위로한다.
시티투어 버스. 2층으로 무작정 올라가는 아이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신호등.
한국어 음성 안내가 반갑다.


독일 분단의 역사가 돈벌이로 '활용'되고 있는 곳. 체크 포인트 찰리.

동서독을 나누던 예전의 국경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 이곳에서 동서독을 오가려 했던 처절한 몸부림들이 느껴진다. 더불어, 3유로를 내면 국경소의 군복 입은 사람과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주변 기념품 가게로 들어가면 1989년 무너뜨린 장벽의 조각들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벽에 그려진, 국경을 넘으려던 사람들의 처절한 모습과 이 기념품의 가벼움이 대조적이다. 한 시대의 아픔이었던 '곳'과 '것'들이, 돈벌이로 둔갑되었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어쩐지 실소를 자아낸다.

이념으로 갈라진 베를린.
처절하게 국경을 넘으려던 사람들. 기어 변속기를 뜯어내고 들어갔던 사람도 보인다.
체크포인트 찰리 기념품.
위병소에는 군복을 입고 3유로에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베를린 장벽 잔해로 만든 기념품.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입구를 수 놓는 수 많은 여권들.


알렉산더 광장. 가장 오래된 것과 현대적인 것의 조화.

베를린 요충지인 '미테'지역에 이르면 알렉산더 광장이 위치해있다. 베를린 성당과 붉은 시청이 있으며, 슈프레 강이 흐르는 이곳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기원전 13세기에 지어져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모 마리아 교회와 높이 368m의 TV타워의 조화가 이채롭다. 알렉산더 광장 한 편에 있는 '만국 시계'도 볼거리 중 하나다. 아이들은 당장 네덜란드와 한국의 시간을 찾는다. 얼추 시간이 꽤 정확하다. 하긴, 시계니까.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이스크림 두 개를 손에 쥐어주고는 알렉산더 광장을 탐색한다. 교회와 TV타워를 한 앵글에 잡기도 하고, 근처 분수 앞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들을 기다려주기도 한다. 잠시 누워 바라본 하늘과 수많은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수군거림의 소음이 잘 어울렸다. 여행의 묘미는 이런데 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채 10분이 안되지만, 뇌리에는 강력하게 박혀있어 아마 이 기억은 수십 년을 가거나 '베를린'하면 당시의 상황이 선명한 사진처럼 당장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녀석이 잠시 우리를 놓쳐 얼굴에 울음이 한가득했다. 다행히 빨리 찾았지만, 딴 데 정신을 놓았던 녀석은 혼자가 된 두려움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모 마리아 교회에 들어가 촛불을 태워 기도를 하며 소원을 빌었는데, 좋아하는 장난감을 갖게 해달라는 것과 함께 더 이상 가족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가족의 소중함을 알길...!

알렉산더 광장. 사람들의 분주함이 흥겹다.
만국시계와 TV 타워Fernshturm.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과 368m의 현대식 TV 타워와의 조화.
13세기에 지어진 비교적 수수한 성당 내부.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기도를. 소원으로 주로 장난감을 갖게 해달라는 것이 대부분.
분수와 성당, TV 타워 그리고 여유로운 오후 햇살.


재건되었어도 괜찮아. 베를린 돔.

언뜻 보면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지만, 베를린 옛 명소 중에서는 어쩌면 가장 젊은(?) 축에 속할지 모른다. 벽돌의 빛깔이나 돔의 빛바랜 초록색이 이를 대변하는 듯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완전 파괴된 아픈 기억이 있다. 그래서 1973년에 재건된 이곳은, 도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회이자 르네상스 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앞 분수에서 바라본 베를린 돔은 그 아픔을 내색하지 않은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돔을 마주하고 바라본 왼편엔 또 다른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겐 어떤 박물관인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거기에 멋있는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에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내려오는 재미있는 놀이의 장소면 충분했다. 가위바위보를 하며 내려오는 동안 와이프와 나는 녀석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저희끼리 깔깔대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아이들이 내 양쪽 발에 털썩 앉아 쉰다. 발등에 앉은 아이들은 힘들지만 그래도 재미있다면 웃어 보인다. 내려다본 아이들이 마냥 기특하다. 가끔은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초콜릿으로 보충을 해줘야 군말 없이 따라올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뭐.

알렉산더 광장에서 걸어가다보면 베를린돔을 만난다.
오래되보이지만 1970년대에 재건 되었다.
가위바위보에 한창인 아이들.
발등에 앉아 쉬는 아이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To be continued in Part 2.



참고: 베를린 여행글 모음

장벽은 없어. 이념은 남았어. Part 2.

천사가 내려온 도시 베를린

- 재건되었어도 괜찮아. 베를리너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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