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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Sep 06. 2017

천사가 내려온 도시 베를린

사람과 사랑에 빠진 천사가 외롭게 서 있던 그곳

베를린 천사의 시


다니엘과 카시엘은 인간의 오랜 역사를 관찰하는 천사다.

그들의 활동 무대는 베를린이다. 인간들의 삶에 간섭해서는 안되며, 눈에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다. 다니엘은 어느 날 서커스에서 공중 곡예를 하는 마리온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를 만질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는 마침내 날개와 불멸을 버리고 땅에 내려온다.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지점이자,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흘린 피를 보며 기뻐하는 천사, 아니 사람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순간이다. 고통을 얻었지만, 사랑을 얻었기에 피를 닦아내며 그는 웃는다.


'베를린 천사의 시' (1987)는 독일 영화답게 묵직하다.

수많은 대사를 흩어뿌려 놓고 더 많은 철학적 질문을 해댄다. 잔잔하다 못해 지루함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즈음, 사람의 삶이 뭘까를 반추하게 한다. 힘든 날이면 틀어 놓고 스르르 잠을 청하고 싶은 영화다.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잔잔하고 묵직해서다. 흔들리는 지친 삶을 차분하게 붙잡고 싶기 때문이다. 결국 끝까지 보면서 아주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만다. 뜻깊은 인문학 책 한 권을 읽은 것과 같은 생각이 들 정도.


천사가 서있던 그곳


긴 코트.

우수에 찬 눈빛. 희미하게 보이는 날개를 등에 달고 인간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던 그곳은 바로 '베를린 전승기념탑'의 꼭대기였다. 실제로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있지만, 영화에선 다니엘의 무대다. 전승기념탑은 독일 베를린 티어가르텐 중앙부에 우뚝 솟아 있다. 높이는 67미터. 이 영화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멀리서 보면, 왠지 다니엘이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없이 출장을 오고, 가족들과 여행도 왔었지만 이 탑을 지나기만 했지 자세히 보거나 올라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승기념탑은 프로이센 왕국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승리를 기념한 것이다.

원래 국가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 세워져 있었지만, 베를린을 세계 수도로 개조하려던 아돌프 히틀러의 게르마니아 계획으로 1939년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바라보면 저 멀리 회전교차로에 우뚝 선 탑이 보인다. 그저 지나다니기만 했던 그곳을, 이번엔 직접 오르기로 했다. 다니엘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이미 인간이 되어 그 삶을 다했을 그를 볼리 만무하겠지만, 그가 바라본 시야라도 느끼고 싶었다.


그가 내려다본 베를린의 모습은 어땠을까?


마침내 그곳에 올라,
묵직한 낭만을 떠올리다.


위치한 호텔에서 여정을 찾아보니 지하철과 버스로 이어졌다.

지하철로는 브란덴부르크 역에서 내리고,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탑이 있는 회전 교차로에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지하도로 가면 마침내 전승 기념탑을 만나게 된다. 기념탑에 도착하면, 그곳을 오를 수 있는 작은 입구가 관광객들을 끌어 모은다. 그곳으로 들어가면 그냥 계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박물관도 있다. 독일의 우수한 건축물을 모형으로 만들어 자세한 설명을 곁들었다. 3유로라는 입장료는 전혀 아깝지 않다.

출발역은 노르드반호프역
브란덴부르크문에도 승리의 여신이 있다
하늘과 구름과 브란덴부르크 문이 조화롭다.
지상 버스에서 내리면 회전교차로와 함께 67미터의 탑이 우뚝 서 있다.
꼭대기엔 황금색 빅토리아상이 있다.
구름이 몰려와 그녀를 호위한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도로 가니 그 중간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청년이 있다.

지하도에 울려 퍼지는 어쿠스틱 기타와 아직은 어수룩한 목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기타 케이스에 놓은 동전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 청년도 사력을 다해 노래 부르는 것 같진 않았다. 아무 관심을 주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걷다가 우측 지하도로 가면 마침내 탑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온다.

지하도를 올라가며 보는 탑의 모양새가, 유럽의 골목을 걷다 마주하는 성당의 첨탑을 보는 그것과 같다. 어디에나 높은 건축물들은 사람들의 고개를 우러르게 하는 것이 목표다. 더불어 그들 존재의 이유. 대부분은 탄성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교회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초라한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이 전승탑은 승리의 기쁨과 자부심을 전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측면이라면, 베를린 전승기념탑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것 같은 빅토리아


그녀의 손엔 승리의 월계관이 꼭 쥐어져 있다.

그녀가 서있는 저기 어디쯤, 천사 다니엘은 서있었을 것이다. 그는 승리의 월계관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에 빠뜨린 여인 마리온을 뜨겁게 갈망하면서. 그곳을 오르기 위해선 285개의 계단을 밟으면 된다. 끝까지 가보면 숨이 많이 차다. 회전식 계단이라 조금 어지럽기도 해서인지, 중간중간에 간이 의자가 있다. 올라가는 사람들의 찡그린 얼굴과, 내려오는 사람들의 한결 편한 얼굴이 대조적이다.

탑으로 올라가기 위한 입구는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작다.
안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실제 탑 위에 있는 빅토리아와는 조금 달리 보이는 미니어처.
브란덴부르크 문의 미니어처도 실제와는 조금 달라 보인다.
얼마 올라가지 않은 곳에서 본 전망
상층부 기둥엔 벽화가 그려져 있다.
회전식 계단은 총 285개다.
중간중간 오르며 보이는 풍경
여기에도 누군가가 달달한 간절함을 걸어 놓았다. 부디, 변함 없기를.
베를린 천사 다니엘은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흔히들 사람들은 베를린 하면 독일의 수도와 장벽을 떠올린다.

동독과 서독을 떠올리며 전쟁을 떠올리기도 한다. 베를린 거리 곳곳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의 상징, 베를린 곰을 생각해내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베를린 천사의 시'를 한 번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전쟁의 상처와 분단의 아픔만 있는 것 같지만, 묵직하고 어둡더라도 어찌 되었건 사랑을 위해 날개와 불멸을 버리고 내려온 천사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가 교차되는 그 지점에 베를린이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지금에야 메세(전시)의 도시라 불리며 상업/ 사업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이때에는 '메세 가격'이라는 공식적인 바가지도 존재하긴 하지만 베를린 천사 다니엘의 인간에 대한 고뇌와,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간절함이 해를 입진 않는다.


베를린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낭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란 말이다. 그것이 결코 가볍지 않고, 핑크빛도 아니며, 인간 본연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곁들어야 하는 것이긴 해도.



참고: 베를린 여행글 모음

장벽은 없어. 이념은 남았어. Part 1.

장벽은 없어. 이념은 남았어. Part 2.

재건되었어도 괜찮아. 베를리너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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