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못 쓰는 소설가의 소설 쓰기
설을 쓰고 싶은데 막상 흰 화면에 글을 적으려고 하면 머릿속까지 새하애진다. 우선 뭐라도 끄적일까 하고 몇 자 적어보지만, 몇 줄 쓰지 못하고 곧 손가락이 멈춰버린다.
이런 경험을 지금 하고 있다면, 가볍게 <장면 묘사>를 해보는 걸 추천한다. <장면 묘사>는 특정 장면을 간단하게 적어보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밥 먹는 장면'을 A4 반 페이지 정도 적어보는 것이다.
예시) '주인공이 밥 먹는 장면'
눈곱도 떼지 않고 식탁 앞에 앉았다. 부모님은 일찍 출근해서 집에 안 계시지만, 식탁 위에는 나를 위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차려진 밥상에 수저만 꺼내 밥을 먹었다. 차려진 지 오래된 국은 식은 지 오래였다. 전자레인지에 30초만 돌리면 따듯해지지만 귀찮아서 그냥 두었다. 다른 반찬 역시 온도가 따뜻하며 더 맛있겠지만, 미식보다는 생존을 위한 식사이기에 기계처럼 손가락을 움직였다. 반찬과 밥을 몇 번 오가다 보니 금세 밥공기 바닥이 보였다.
분량 상관없이 소설 한 편이라도 써본 분
스토리 구상이 어색할 뿐 소설 쓰는 데는 문제가 없는 분
결론까지 끌어가는 건 힘들지만 단편적인 장면 묘사는 부담되지 않는 분
소설을 한 번도 안 써봤지만 위의 예시를 지금 써봤을 때, 어렵지 않게 술술 쓴 분
사실 스토리 없이 장면 묘사만 연습하는 건 필력을 향상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설은 이야기 없는 장면의 집합이 아닌, 이야기가 담긴 장면의 집합이다. 그래서 아무 이야기 없는 장면을 수천번 연습하는 것보다 이야기가 담긴 장면을 연습해야 한다.
그럼 소설 처음 쓰는 사람은 왜 <장면 묘사>를 연습해야 할까?
낯선 장소에 가면 익숙했던 것도 낯설어진다. 매번 가던 밥집이 아닌 새로운 식당에 갔을 때를 떠올려보자.
새로운 식당의 계산은 선불인지 후불인지 확인하고, 물과 반찬은 직접 가져오는 건지 확인하고, 화장실 위치는 어디인지 보고, 물은 셀프인지, 수저는 어디 있는지...
단 하루만 새로운 식당의 시스템을 알면, 두 번째 방문부터는 내 집처럼 편해진다.
새로운 장소를 갔을 때 낯선 것처럼 소설 역시나 처음에는 낯설어서 몸이 굳어버린다. 태어날 때부터 듣고 말하고 쓰던 한국어인데도, 소설이라 생각하고 쓰면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석대로 소설을 쓰기보다는 굳은 몸을 푸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장면 묘사>인데, 가볍게 <장면 묘사>를 해보면서 낯선 소설이 편해지는 걸 경험할 수 있다.
예시는 반드시 '주인공이 밥 먹는 장면'일 필요는 없다. 커피 마시는 장면, 출퇴근하는 장면, 작업하는 장면 등등 나에게 친숙한 장면을 선택해서 <장면 묘사>를 하면 된다.
아무 설명 없이 무작정 써보는 이유는 현재 역량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사람마다 글 써본 경험(블로그, 일기, 소설, 에세이 등등)이 달라서, A는 소설이 처음이지만 바로 장면 묘사를 술술 쓸 수 있고, B는 문장 하나를 완성하는 것도 힘들 수 있다.
※ 참고로 A와 B의 차이는 타고난 재능의 유무 때문이 아니다. 낯선 장소에 가도 어색함을 느끼지 않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낯선 장소에서 충분히 시스템을 숙지한 뒤에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이 차이는 타고난 재능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성향이 다를 뿐이지 재능과는 무관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A보다는 B에 가깝다고 해서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아직 소설이 익숙하지 않을 뿐, 소설과 익숙해지는 건 단 하루만 연습해도 A처럼 쓸 수 있으니까 말이다.
1단계에서 어려움 없이 A4용지 반 페이지를 채웠다면 이 글을 안 봐도 된다. <장면 묘사> 연습이 아닌 다른 연습이 필요한 경우라 추가적인 <장면 묘사> 연습은 시간 낭비일 수 있다.
▶ 소설 도입보다 '마지막 장면'을 먼저 써야 한다
▶ 소설 쓰기 첫 번째 : 줄거리 늘리기
▶ 소설 쓰기 두 번째 : 줄거리 쓰기
1단계 무작정 쓰기가 잘 안 되었다면, 아래와 같은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소설이니까 소설스럽게 써야 한다는 무의식('소설스럽게'가 무엇인지 말로 표현은 못 하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아서
2단계는 <소설이니까 소설스럽게 써야 한다는 무의식>을 깨려고 한다.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일기 쓴다고 생각하고 써보는 것이다. 주인공은 '나'이고, 밥 먹는 장면은 '평소에 내가 밥을 먹는 장면'이다. 그리고 문법 무시하고, 어휘 순화도 신경 쓰지 말자. 내 속마음을 마음껏 털어놓는 일기처럼 편하게 써보자.
예시) '주인공이 밥 먹는 장면' 일기 쓰듯이 (주인공은 '나')
... 더럽게 맛없네. 이 말을 하면 엄마가 등짝 스매시를 날리겠지? 입 안에서 돌처럼 돌아다니는 밥알을 억지로 삼켰다. 이렇게 맛없는 걸 나처럼 군말 없이 먹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공부 머리는 없지만, 이런 걸 보면 나만한 효자가 없지.
3단계는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지지 않는 사람을 위한 방법이다. 보통 소설을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쓴다고 하지만, 소설은 상상력으로 쓰는 글이 아니다. 머릿속 생각을 글로 옮기기 위해서는 두리뭉실한 상상이 아닌 또렷한 그림을 떠올리고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밥 먹는 장면'이면 '주인공 = 나'라고 생각하고, 평소 내가 밥 먹는 장소를 떠올려보자. 그럼 두리뭉실하였던 그림이 명확해진다. 더불어 현재 내 눈을 카메라라고 생각하고 전체 풍경을 찍어보고, 줌으로 확대도 해보자. 그럼 <밥 먹는 장면>이 하나의 장면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다.
예시) '주인공이 밥 먹는 장면' / 카메라로 촬영 중이라고 생각
(드론으로 풍경을 촬영 중이라고 생각) 날씨는 무덥지만 하늘은 가을이 온 걸 알리듯 어제보다 높아져 있었다. 계절의 변화를 의식한 듯 아파트를 나와 출근하는 사람의 복장이 가지각색이다.
(집 내부를 촬영하는 카메라) 월요일이라 출근으로 바쁜 밖과 달리 A의 집은 고요하기만 하다. 부모님은 바쁜 출근길에 합류한 지 오래지만,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A만은 이불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다.
'꼬르륵'
이불에서 강제로 꺼내 식탁 앞까지 끌고 온 건 배꼽시계였다. 에너지 공급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신체 신호에 A는 억지로 식사를 시작했다.
카메라라고 생각할 때,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쉽다. 예능, 드라마, 영화 장르 상관없이 자주 보는 프로그램의 카메라 화면을 떠올려보자. 그 카메라 움직임을 따라 머릿속 장면을 자세히 그려보면, 감이 잡히지 않던 <장면 묘사>를 편하게 쓸 수 있다.
<장면 묘사>는 1~2시간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다음 <장면 묘사> 연습은 스토리없는 <장면 묘사>가 아닌, 결말이 있는 소설을 쓰면서 그 안에서 <장면 묘사>를 연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