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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hee Apr 12. 2024

한국 영어 교육의 위력을 아십니꽈!?

내 인생은 영어와는 뗄 수 없는 숙명처럼 이어져 왔다.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알파벳 읽는 수준이었던 영어라는 언어

중학교 입학 하기 전에 미리 나누어준 영어책을

호기심에 한번  열었는데

어!  생각보다 참 쉬운 영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Standard English라는 영어책을 사용 중이었고 그 첫 과에는 

아버지(father), 어머니(mother)가 쓰여져 있었던 것 같다.

아.. 지금 이야기는 무려 50여 년 전 이야기이니까

아마도 라떼를 넘어 다른 행성의 이야기라 여겨질지도 모른다 ^^

당시 절친이 간 학교의 영어책은 Tom and Judy였고 나는 그게 참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왜냐면.. 더 멋지게 들렸으니까 ㅋㅋ

미국 이름 톰, 쥬디.. 너무나 이국적.. 당연 미국 이름이니 이국적이지만 ㅋㅋ

암튼 

father, mother 도 접한 적 없던 나는

알파벳은 읽을 줄 알았으니

영어단어는 알파벳으로 읽는 줄 알고

하나하나 또박또박 

에프 에이 티 에이치 이 알! 이라고 읽으며

읽기 쉽네..했던 것이고 이렇게 다 읽을 수 있으니 영어 별거 아니구나 생각했었던 것이다.


엄마 친구되시는 옆집 리자 아줌마는 대학을 졸업했다고 들었다. 그 리자 아줌마는 몸이 병약하여 집에서 쉬면서 가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엄마를 친구 삼아 이야기를 나누시려 우리 집을 방문했다.

내가 마루에 엎드려 엠! 오우! 티! 에이치! 이! 알! 하는 것을 보시더니

영희야! 그렇게 읽는 게 아니야.

아줌마가 가르쳐 줄게.. 하시면서

영어 단어 밑에다가 한글로 파더, 머더, 써주시며

학교 갈 때까지 매일 조금씩 같이 공부하자고 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영어와의 만남은 숙명이 되어

미국 유학, 이민으로까지 이어져서 아직도

온전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다니는 영어의 포로가 되어있다.


한국사람이면 다 아는

그런 중학교, 고등학교 영문법 교육을 거쳐

대학에서는 영문학 전공을 하고

영어교사로 10여 년을 봉직하고 

미국 어느 대학원 교실에 앉아있었던 나 영희!

는 그런 한국교육의 실체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매시간마다 영희를 불러 제끼는 닥터 쉐프로 인해 좌절감을 넘어 통감하다 절망의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스트레스는  급기야 약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고통으로 몰아갔다.

타이레놀, 애드빌로는 해결하지 못해 강력 진통제를 처방받고

위통으로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죽으로 연명하여

내 인생 최대치로 체중이 줄어서

그 아픈 와중에도 살짝 기쁘기도 했던.. 가만 보면 매저키스트 경향이 있는 듯 ㅋ


그렇게 두통으로, 위통으로 고통을 달고 살았지만 어찌어찌 한 학기를 지나고

두 번째 학기를 맞이했고

내가 등록한 두 번째 학기에는 Synthetic Analysis 라는 과목이 있었다.

영어교육 전공이 아닌 영문학 전공이었기에 수강 과목 제목을 들어도 뭔지 몰랐고

그저 필수 수강과목이니 하라는 데로 하지만 뭔지는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미리 알아 먼저 두통앓이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첫 시간

그 닥터 쉐프의 강의이니까

한 줌 희망도 없이 우울하게 앉아 앞으로 닥쳐 올 파고를 겸손히 받아들이자 각오에 각오를 하고 있는데

허거걱!

이게 뭔가?

영문법 공부 시간이었다.


허엉?

눈 감고도 하는 영문법!

영어 문장 구조 분석 시간이다.

할렐루야! 땡 갇!(Thank God!) 이다.

나의 신은 살아계시다더니 정말이구나!

하면서

달아 주신 날개에 힘입어

나는 높이 높이 날았다.


영문법을 기초로 영어문장 독해에 주력하게 만드는 한국영어 교육 방식 만쉐이! 를 외쳤다.

주어, 동사, 목적어, 보어, 수식어 찾기는 누워서도 떡을,  아니 자다가도 목 막히지 않고 먹을 수 있었던 나는

새끼 티쳐가 되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노랑눈, 노랑머리 미국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이상 얄긋한 문장 하나를 가지고 와서

닥터 쉐프에게 문장 분석을 요청했고

그! 닥터 셰프도 칠판 앞에서 머리를 갸웃거리며

입에 손가락을 대고 흠.. 흠.. 하고 있을 때


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해 볼게!


칠판에 일필휘지를 날리듯

문장 구조를 좌라락 분석을 해 주었을 때

아마 내가 긴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머리 한번 휘익 날려주고

자리에 와서 앉았을 텐데 ㅋㅋ

아쉽게도 머리숱이 적어 서글펐던 음하하하


바닥을 뚫고 들어갔던 나의 자존심은

교실 천정을 뚫을 기세였다.


독자 분들은 나의 표현이 과장법을 사용했다 생각할 테지만

No! No!

틀리셨습니다!

지금 그때의 심정, 분위기가 딱 그랬다.


닥터 쉐프의 콧대를 한방 먹이고

나는  눌리고 억압받던 상황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잠시나마.. 는 물론 다른 과목들은 여전히 나의 삶을 짓누르고 그러나 다른 교수들이니 닥터 쉐프와 같은 만행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늘 스트레스를 풀 장착하고 살아야 했기에 그렇다.


한국 영어교육은 절대 문제가 없다.

미국에서 공부 중

영어원서를 읽어 내면서 한국에서 그렇게 훈련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책들을 감당할 수 있었겠나 하면서 고마웠다.


다만 시집살이도 아니고

나를 귀머거리 3년 , 벙어리 3년을 하게 만든 듣기와 말하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영어교육은 조금 손을 보긴 해야 하지만

한국민 모두가 미국 유학을, 이민을 목표로 사는 게 아니니까 적당하게 평형을 유지하는 선에서.


암튼

당시 나는

한국 영문법 독해 교육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영어교수법을 수강하면서

그것은 제2언어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 비용 안 드는 교육인 grammar-translation method에서 나온 교육이고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거기에서  크게 발전되지 못했다는 분석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에 많은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만큼이라도 교육을 중요시하며 최선을 다했다는 데엔 이의가 없다.


콩나물시루 같던 6,70년대 교실에서는 그 이후에 나온 영어회화 교육에 유용한  direct method( 2차 세계대전시 적국의 언어를 가르치던 방법, 일대일 영어회화 비슷), 

audio lingual method ( 원어민의 영어 듣고 말하기 반복, 내가 영어교사 할 때는 언어실습실을 학교마다 만들어서 사용하고는 있었음) 등을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유학생활은 중반기를 넘어가고 있었고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학생 아파트의 한국유학생 가정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한국음식 만들어 먹으며 타국살이 서러움, 외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아름다운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순이네, 오윤이네, 한주네, 수진, 진아, 현아, 희연, 모두 모두 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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