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독립, 오피스텔 월세

미국 월세보다 훨씬 싼 한국 월세를 선택하다 by 믹서

by 유유히유영

4 , 1년간의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기자로 살며 돈은 벌었으나 월급은 미국 물가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최소 비용으로 생활해도 결국은 소비가 소득을 초과하니 있던 돈을 까먹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지출은 역시 집세였다. 한 사람 월급이 거의 월세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말 다했다. 1년 동안 서서히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다가 거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현실은 외면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법,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대책이 필요했다.


출국 일은 앞두고 한국 부동산 정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장 전세는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일단 월세로 살자고 오빠와 합의를 했다. 미국 오기 전까지 월세로 살아보지 않아서 감이 없었던 것인가, 세상에! 한국 월세는 미국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저렴했다. 당시 뉴욕 집 월세의 삼분의 일도 안 됐다.(서울 인근 경기 지역) 당연히 물가 차이가 있으니 단순 비교하면 안 되지만, 감정적으로는 이미 안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디서 살고 싶은가


월세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 어디에 살지만 정하면 되었다. 오빠가 물었다. 한국에 가면 어디에서 살고 싶느냐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호수가 있고, 공원이 있으면 좋겠다. 오빠는?”
“난 부모님 집과 거리가 조금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독립할 수 있을 것 같아”


오빠도 나도, 의외로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다행히 집에 대한 니즈가 명확해서 동네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호수도 있고 공원도 있고 부모님 집에서도 먼 동네면 딱 한 곳밖에 없었다. ‘일산’


호수도 있고 공원도 있고. 말 그대로 일산 호수공원 가까이에 있는 오피스텔은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갖춘 곳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바로 일산에 있는 한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하루 만에 마음에 드는 복층 오피스텔을 찾게 됐고, 양가에 분산되어 있던 짐들을 조금씩 빼서 이사를 했다. 미국에서 부친 가구 몇 개도 한 달 후에 도착을 해 차차 살림을 꾸리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짐들을 많이 정리해 놓아서, 뜻하지 않게 미니멀리즘을 실현하게 됐다. 정말 필요한 물건들만 남기니 가벼운 느낌이 들고, 새출발 하는 기분이어서 좋았다.


일산이라니! 오피스텔이라니!


‘일산’이라는 동네는 생소했다. 전혀 연고가 없는데 우리 부부는 덜컥 일산을 선택했다. 양가 부모님도 당연히 의아해하셨다. 오빠와 나는 강동, 송파가 고향이라 자라면서 서쪽은 몇 번 가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좀 가까이 살려나 했는데 일산이 웬 말인가 싶으셨을 거다. 서울 강동 쪽에서만 40년 이상을 사신 부모님에게 일산은 엄청 먼 지방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부모님들은 우리 의견을 존중해 주셔서 크게 반대하진 않으셨지만 서운한 감정을 감추진 못하셨다. 게다가 오피스텔 월세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아빠는 지나가는 말로 “무슨 소꿉장난 하냐”라고 못마땅한 기색을 비치기도 했다. 역시 제일 어려운 상대는 가족이다. 우리 부부가 원하는 바대로 최선을 다해 살 집을 정했지만, 양가 부모님 모두 만족할만한 집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비싼 월세’가 가장 고민이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집 문제를 포함하여 ‘어떻게 하면 가족과 잘 소통하며 지낼 수 있을지’가 난제였다. 집은 결국 선택의 문제였고, 눈 질끈 감고 이기적인 결정을 하게 됐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전격 독립’ 했다. 결혼해서 분가했다고 독립이 아니고, 미국처럼 먼 곳에 뚝 떨어져 산다고 독립이 아니었다. 부모님 의견에 거스를지언정 우리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결정하는 것이 진짜 독립이었다. 호수도 공원도 중요하지만, 오빠가 바라던 바대로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 의미가 컸다. 때는 바야흐로 결혼 5년 차였다.


오피스텔, 딱이로세! 그러나...


일산 오피스텔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우리 라이프스타일과 궁합이 잘 맞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오빠와 나는 한동안 언론사 기자로 지냈다. 난 영상 뉴스와 미니 다큐 제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출퇴근 시간도 줄여가며 편집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재택근무도 많이 했다.


일산 오피스텔촌은 나처럼 바쁜 현대인들이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새벽까지 문 여는 식당도 많았고, 오피스텔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필요한 것을 빠르게 살 수도 있었다. 관리비가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안전하기도 했으니 만족하며 살았다. 우리가 살던 오피스텔 바로 앞에 호수공원이 있어서 오빠와 가끔 산책을 하며 기분 전환하기도 참 좋았다.


그렇게 2년을 지냈다. 가장 치열하게 일했고, 그만큼 영상 작업 스킬 발전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살면서 그렇게 바빴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정신없이 살며 일에 초집중했지만, 한편으론 고민도 피 터지게 많이 했다. 그건 바로 ‘아이’에 대한 고민이었다.


아이 문제는 여러 가지 이슈가 중첩된 문제였다. 그중에서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이슈다. 우리 부부가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멀리 살 수 있었던 것도, 오피스텔에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면, 일산 오피스텔 월세란 우리 부부의 선택 목록에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거다.


일산에 살 당시 나는 3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고, 다양한 활동을 하며 피디로서의 커리어가 쌓여가는 때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가질 것인지 말 것인지 갈림길에 섰다. 2014 겪은 유산 경험도 큰 트라우마와 두려움으로 작용했다. 마음이 잔잔하게, 때론 큰 파동으로 요동쳤던 때가 바로 일산에 살던 시기다.


아이를 원하는 양가 부모님의 잔소리도 그때가 제일 심했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기도 했고 일 때문에 너무 바쁘던 시기라 부모님과의 만남이 잦지는 않았지만, 압박의 강도가 셌다. 아이 문제는 '어디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독립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더 단단히 먹었다. 아이 역시 부부가 선택할 문제였고, 두 사람이 최선의 결정을 했으면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거라 여겼다.


일산 오피스텔에서 월세로 살기로 한 건 단순히 집으로서의 선택만이 아니었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독립적으로 살아갈지, 삶의 방향은 어디로 향할지 그 기로에 서서 그 고민들을 조금씩 해제해 가는 과정이었다. 4년이 흐르고 되돌아 보니, 부모님으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산 시절을 보내면서 부모님과 인간 대 인간으로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 집이란 때때로, 인생길에서 중요한 푯대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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