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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y 27. 2020

흠뻑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무엇인가에 빠진다는 것.

비 오는 일요일 아침

비가 오려나 보다. 하늘이 낮게 내리고 흐릿해졌다. 따끈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나의 카페에 앉으니 일요일 아침이 주는 여유로움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아~, 좋다.'




창 너머로 남편이 보인다. 부지런한 나의 남편. 또 뭔가 하려나 보다. 정원 한가운데에 자신보다 배는 커 보이는 사다리를 세우며 자세를 잡는다. 나쁜 징조다.


'어허, 이 사람 또 나의 일요일을 잡아먹겠군...'


난 남편을 무시할 수 있다. 아니, 무시해도 된다. 남편은 남편의 일을 하는 것이고, 나는 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난 이 자리에서 나의 일을 하면 된다.


주문을 외운다. '난 나의 일을 할 것이다. 나의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남편은 남편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무시하려 하는데 그게 안 된다. 남편이 하는 일은 남편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편이 하는 일은 우리 집의 일이니 나의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자리가 바늘방석이다. 바늘방석에 앉아 고문을 당하느니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 "eight, 망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젖히며 물었다.

"지금 뭐하려는 거예요?"

"나무가 너무 자랐어. 좀 잘라줘야 바람이 드나들 것 같아"

"날씨가 흐린데 비가 오면 어떡하려고 일을 시작해요?"

"비가 오기 전에 얼른 잘라야지"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싶지만 이왕 시작한 것이니 비가 오기 전에 마치려면 서둘러야 한다. 남편은 울창하게 자란 자두와 매실의 가지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싹둑싹둑 잘라낸다. 잘려 떨어지는 잎들을 보니 심장이 쿵. 쿵. 내려앉는다. 그 잎들은 더운 여름날 우리 집 마당을 시원하게 만들어 줄 천연의 숲이었다. 그런데 그 풍성한 잎들이 이렇듯 허무하게 잘려나가고 있다. 바람이 통해야 열매가 자라고, 틈이 있어야 주변을 살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런 걸 보면 성격이 대담하지 못한 사람은 정원도 가꾸지 못할 거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존재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는 안타까움은 소심한 사람에겐 가슴 아픈 일일 테니.


남편 옆에서 삐죽삐죽 올라온 철쭉의 밤톨머리를 다듬어내고 있는데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다. 화끈거리는 얼굴에 뿌려주었던 미스트의 시원함이다. 기분은 상쾌하지만 예감은 좋지 않다. 비가 올 것 같다.


톡, 토독, 토독

돌덩이 위로 동그란 그림이 하나씩 그려진다. 비다. 그래, 기어이 오는구나.


"비가 오는데 어떡해요? 그만 하고 들어갈까요?"

"하던 건 마무리하고 가야지. 먼저 들어가 있어"


커다란 우산을 하나 챙겨 들었다. 옆에서 받쳐주려는데 여의치가 않다. 일하는 사람에겐 방해가 되고 나에겐 비를 선물하는 무용지물이다. '에라 모르겠다. 나라도 피해야지'

남편에게 미안했지만 우산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 옆을 지켰다. 우산 위에서 토독거리는 소리가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간다. 듣기 좋은 소리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비가 내린다. 굵어진 빗방울이 땅을 딛고 올라 나의 신발을 적셨다.


"나는 들어가야겠어요"


일하는 남편을 버려두고 차양 밑으로 뛰어들었다. 벤치에 앉아 남편을 구경하는데 세찬 빗속에서 샤워라도 하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고 나를 향해 V자를 만들어 보인다. 비가 오기 전에 분주했던 남편의 손은 비를 맞은 후엔 차분해졌다. 남편은 물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물아일체. 남편은 비와 한 몸이 된 것이다.


춥지 않냐는 나의 물음에 시원해서 오히려 일하기가 좋다고 한다. 흠뻑 젖은 남편이 빗속에서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다.


흠뻑 젖으면 즐기게 된다.


처음 서늘한 가랑비가 바람을 타고 나의 얼굴을 스쳤을 때 난 그 서늘함을 좋아라 했다. 그러다 빗방울이 굵어지니 화들짝 놀라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결과로 난 남편이 경험한 빗줄기의 상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남편이 일하는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보였다.


난 무슨 일이든 새로 시작한 일은 두근거림으로 좋아라 한다. 바람을 타고 온 가랑비처럼 말이다. 그러다 힘들거나 지치면 조용히 그 일을 미뤄둔다. 굵어진 빗방울을 피하듯. 결국 진정한 기쁨은 맛보지 못한 채 처음의 일을 마무리하고 만다. 세찬 빗줄기에 흠뻑 젖지 못하고.


그러나 남편은 다르다. 늘 흠뻑 젖는다.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그 일에 깊이 빠져든다. 삶이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 힘든 고비를 넘겨내고 달콤한 기쁨의 열매까지 맛봐야 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라톤에 익숙해졌 듯, 조정래 선생님이 평생 글 쓰는 일에 익숙해졌 듯 자신만의 루틴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나가 일의 기쁨을 맛봐야 한다.


빗속에서 웃으며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을 통해 흠뻑 젖어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보았다. 나의 삶도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삶이 되길 바라본다. 서늘한 바람만 좋아라 말고, 세찬 빗줄기의 상쾌함도 맛보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러면 나도 그 일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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