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의 격리생활 <77~78일 차>
77일 차 (생활 속 거리두기 42일 차) - 5월 31일
이날은 나의 34번째 생일이자
4년 연속으로 선상에서 맞이하는 생일이었다.
아침 6시에 출근해보니
친구들이 데스크를 예쁘게도 꾸며놨었다.
생일에도 어김없이 하선은 계속되었다.
필리피노 격리 크루 21명과
싱가포리안 말레이시안인데 필리피노랑 결혼해서
필리핀에 거주 중인 바텐더 SK,
총 22명이 하선했다.
이 SK 놈 하선시키느라 고생 많았다.
아내랑 자식 2명이 마닐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거주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복잡한 절차와 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내에게 한정적인 재정적 원조만 하기 위해
지금까지 10년도 넘게 휴가 기간 동안에만
비용 부담이 없는 관광 비자로만 필리핀을 방문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었다.
합당한 비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닐라에서 하선해서 가족에게 가고 싶다고 하여
진짜 가족이 마닐라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하선 허가를 받기까지 42일이 걸렸다.
그 외에 벨라루시안 2명, 세르비안 1명,
스웨디시 1명, 모두 합쳐 26명이 하선했다.
하선 업무가 끝나고 나니
대빵 보스 닐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보자고 했다.
아무리 보스랑 친하다고 해도
아무리 매번 나를 좋게 봐준다고 해도
보스는 보스다.
더군다나 프라이빗 콜은
항상 긴장하게 되기 마련이다.
긴장하며 들어갔더니
혹시 집에 빨리 가고 싶으면 지금 말하라며
오피셜 레터를 주었다.
레터를 읽어보니 Red Manning의 일원이니
오리지널 컨트랙 하선 예정 날짜인
8월 20일까지 남으라는 내용이었다.
Red Manning이란
Hot Manning, Moor Manning이라고도 하는데
Essential Manning (최소 운영 인원) 172명에서
완전히 더 최소 운영 인원으로 줄인
70명 정도를 예상 중인 인원을 말한다.
사실 Red Manning 체제는
멈춰서는 안 되는 배를 움직이게 하는
엔진을 계속 돌려야 하는 인원만 필요한 경우이다.
그래서 Moor (계선, 繫船) Manning
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호텔 부서가 아닌
조타실과 엔진 관련 부서만 필요하지만,
그들이 할 수 없는
호텔 영역을 관리 및 보전할 수 있고
혹여라도 정상 운영하게 되었을 때
그에 맞춰 필요한 준비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최소 인원만을 선별하여 남기는 것이다.
선사에서 현재로서는 11월 23일까지
공식적으로 모든 운영을 중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더 연장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 배는 갈 곳이 없어 아직도 바다에 표류 중이다.
우리 배뿐만이 아니다.
100여 척의 크루즈선과 컨테이너선까지 합치면
아마 300척은 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이 배들이 정상적으로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크루징 할 수 있는 노선이 필요하고
물론 정상 운영 인원의 크루가 필요하고
크루를 부르자면 항공편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해당 국가의 항공편이 정상 운영해야 하고
이후 크루가 재승선하게 되면
지난 3월부터 사용하지 않은 호텔 영역을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야 승객을 다시 부를 수 있게 된다.
더 자세하게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간단하게는
모든 것이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돌아가야
크루즈도 정상 운영이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그게 현실적으로 언제가 되어야 가능한 일일까.
개인적으로는 올해 안에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기적처럼 백신이 나온다고 해도
아직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염과 사망이 설사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운영 복귀를 위해서 적어도 한 달은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예상으로는
빠르면 내년 봄이나 여름은 되어야
크루즈가 정상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나를 포함한 수천만명의 크루가
그때까지 일을 못하게 된다.
육지에서 다른 일자리를 찾는 방법도 있겠지만
육지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 하는 크루가 많거니와,
전 세계에서 실직자가 늘어나는 시점에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사실은 많은 크루들이
있을 수 있을 때까지 남아있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건 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직책, 그리고 이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사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인원에 보스가 나를 집어넣은 것이다.
배에 더 있어야 하냐고 집에 못 가냐고
컴플레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을 바꾸면 굉장히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원래의 하선 날짜는 3월 2일이었는데
심상치 않은 상황을 걱정하여
2월 중에 연장 신청을 했고
3월 중에 재차 연장 신청을 했지만
4월 12일까지만 확정받았었다.
그래서 4월 13일부터는
집에 가지도 못하고 배에서 일하면서도
샐러리가 없는 베케이션 기간이었다.
그런데 Essential Manning 체제로 들어가면서
보스가 날 다시 불러서 5월 1일부터는
풀로 샐러리를 받는 컨트랙 기간이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Red Manning 체제로 들어가면
원래의 예정 하선 날짜인 8월 20일까지
풀로 샐러리를 받으며 남아있으라는 것이다.
8월 20일은 무슨 날짜일까.
집에 가서 몇 개월, 어쩌면 반년도 넘게
배로 못 돌아오는 것보다
어차피 배에 있는 거 더 있으면서 일 하는 것이
나은 일이라 생각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왔다.
연장 신청을 했던 것이 사실은 확정되었던 것인데
전체적으로 선사 상황이 너무 복잡하여
시스템이 제대로 업데이트 안되었던 것이고
그것을 알아낸 보스가
날 Essential 그리고 Red Manning에까지
밀어붙인 것이 아닐까....라는 예상만 할 뿐이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진짜 고마운 일이다.
친한 친구들이 집에 다 가고도
두세 달을 빅 보스들이랑만 있는 것이
항상 3천 명은 있는 배에 70명만 있는 것이
그때쯤이면 육지를 못 밟은 것도 5개월이 넘는 것이
모든 것이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다.
그때는 진짜 집에 갈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때까지 배고프니까 먹어야만 하는 끼니를 때우며
긍정적으로 잘 버틸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이런저런 튀어나오는 걱정들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스가 준비해준 생일 선물이라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운데 있는 남자가 내가 대빵 보스라고 부르는
사우스 아프리칸 HORM
(Hotel Operation and Retail Manager) 닐.
그리고 우리들의 빅 앤젤 마마로 정말 쿨한
사우스 아프리칸 CSM
(Customer Services Manager) 로넬.
이 둘만 있으면 그 어떤 일이 생겨도
든든하고, 또 든든하고, 그저 든든하다.
제일 친한 친구 재패니즈 리셉셔니스트 마리나.
방도 같이 외출도 같이 일도 같이 하는데도
서로 많이 다르면서도 비슷한 것도 많은
단 한 번도 트러블이 안 생기는 친구다.
해외생활과 뱃생활 총 14년 통틀어서
외국인 친구 중에는 단연 톱클래스급이다.
Red Manning 체제로 들어가면
마리나도 하선하게 되는데 벌써부터 눈물 난다.
같은 팀 매니저들이자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네덜란더 어드미니스트레이션 매니저 닉,
빅 보스 중 한 명인 인디안 호텔 오디터 알렉스.
Red Manning 체제로 들어가면
닉은 하선하게 되고
알렉스는 호텔 오디터 겸 파이낸스 매니저로서
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남게 될 예정이다.
4년 뱃생활 중
4번째로 크루즈에서 하는 생일 파티였다.
보고 싶은 가족이나 친구는 없지만
그저 또 다른 Sea Day일 뿐인 내 생일을
특별한 날로 만들어 주는 뱃가족과 함께한
행복한 생일이었다.
78일 차 (생활 속 거리두기 43일 차) - 6월 1일
라트비안 3명과
싱가포르 거주 재패니즈 1명의 하선이 있었다.
그런데 사달이 나고 말았다.
이 라트비안 3명이
공항에서 탑승을 거부당했다는 것이다.
이미 하선해서 공항에 도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배로 다시 돌아오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컸다.
우리는 다른 항공편이 가능한지 알아보았다.
다행히도 밤늦게 출발하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통해 가는 방법이 있었다.
새로 예약하려고 하는데
탑승 거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소 처리를 빨리 해주지 않아
다시 예약을 하고 확정받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 3명의 크루는
공항에서 마냥 기다려야 했다.
서너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행히도 항공편도 확정되고
크루도 탑승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아
감사하게 잘 마무리되었다.
한 숨 돌리고 있는데
또 다른 사달이 나고 말았다.
보스 로넬과 브라질리안 친구 안드레아가
내 생일 파티를 위해 DJ 바비에게 부탁해서
아주 나이스하게 신난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바비가 오전에 체온 검사를 하러 갔다가
고열로 판정되어 격리 처분당한 것이었다.
그 외에 밀접 접촉자로 판정되는
10명의 크루도 함께였다.
격리된 크루 중에는
바비에게 DJ를 부탁한 보스 로넬과
하선 예정이었던 안드레아와
다른 브라질리안 동료 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 같이 즐겁게 파티 잘해놓고 이게 뭔 일인지..
사실 우리 배는 격리된 시점부터
다른 배 보다 굉장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단 한 명의 승객도 없었고
단 한 명의 감염자도 없었기 때문에
지구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서 격리 36일이 지나고 필리핀의 요구 때문에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시작했어야 했을 때
불필요한 드라마를 두고 불만이 많았었다.
그래서 모두가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도
파티를 할 때는 솔직히 다들 느슨해져서
거리두기보다는 즐기기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그러다가 결국 사달이 난 것이다.
사실 바비가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성은
정말 정말 정말 제로이다.
고열은 분명 전날 밤 파티에서
신나게 넘치게 마신 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닥터가 격리 처분을 내린 이상
우리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보스 로넬이 격리된 덕에
우리 팀은 업무 시간과 양이 늘어났고,
2명의 브라질리안은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하선이 취소되고 말았다.
게다가 11명 모두를 한 구역으로 격리시키고
완전하게 공기를 차단하여 격리시키기 위해
수십 명이 방을 다른 구역으로 옮겨야 했다.
물론 나도 포함이다.
78일 동안 6번째 이사다.
What a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