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군지에서 수학과 국어로 이름난 인기 강사 Y와 J가 수능을 마치고 우리 집을 찾았다. 명절도 연휴도 없이 1년 내내 달려온 그들은 수능이 끝나야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수업을 물리고 3일 내내 제자의 장례식장을 지켰던 그들의 슬픔은 가족의 것과 다르지 않다. 드디어 수능 이후 잠깐의 틈을 내어 딸이 있는 추모공원을 함께 찾기로 했다. 그들은 내 자녀의 선생님이기 전에 나의 후배이자 친구들이다. 딸이 수능을 마치면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함께 베를린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약속은 이제 지킬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수줍음 많던 제자를 잃고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Y와 J는 한국 공부를 안 해 본 딸이 한국의 교육에 소프트 랜딩할 수 있도록 아이를 기꺼이 품어 주었다. 그들의 수업을 들으려면 긴 시간을 대기해야 하는 바쁜 강사들이지만, 없는 시간을 쪼개어 딸을 가르쳤다. 내가 그들을 찾아간 이유는 단지 그들이 유명 강사여서가 아니다. 치열한 사교육의 중심에 있지만, 그들은 딸의 좋은 멘토가 되어줄 따뜻한 어른들이다. 이 친구들이라면 아이가 내게는 털어놓지 못할 속마음도 털어놓을 스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선생님은 제가 처음으로 의지한 어른이자, 선생님이세요.
늘 제게 최선을 다한 위로를 건네주셨어요.
그저 제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떠난 후 여러 생각이 드시겠지만, 저를 그리워하기보다는 추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예상대로 딸은 마음을 열었고 의지했다. 학원가는 시간을 좋아했다. '수업대신 쌤이랑 떠들다 왔다'라고 할 만큼 학원을 다녀오면 오히려 긴장이 풀려 보였다. 딸은 떠나는 날 Y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외로웠던 아이에게 처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준 그들이 사무치게 고마웠다. 후배들은 딸의 투병 기간 동안, 아이뿐만 아니라 불안에 떨던 나까지도 붙잡아 주었다.
그들은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유족다워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그냥 나로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내 편이다. 엄마의 따스한 눈길에 신이 난 아기처럼, 나는 몇 달간의 침묵을 깨고 속의 말들을 쏟아냈다. 그러다 딸이 Y에게 보낸 메시지 중 한 구절로 인해 내가 자책에 빠졌던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저희 엄마 아빠 이기적이지만 잘 부탁드려요.”
나는 이 문장에 사로잡혀 몇 달을 괴로워했다. '어떻게 했길래 아이에게 이기적인 부모로 비쳤을까?' 이 질문을 수없이 되뇌며 나 자신을 후벼 팠다.
“그러다가 안 되겠어서 상담 선생님께 여쭤봤어. ‘아이가 왜 우리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을까요?’ 하고 물으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시더라. 그건 아이가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하면서 부모를 부탁한 건데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때 알았지. 내 죄책감에 맘대로 해석했다는 걸.”
"누나, 그걸 몰랐어? 왜 말 안 했어? 나한테 물었으면 바로 아니라고 했을 텐데.”
“만나면 물어보려 했지. 너는 그 마음을 알 거 같았어. 그런데 선생님 말씀 듣고 나니까 이해되더라. 그날 남편 붙들고 한참을 울었어. ”
오해가 풀리던 순간, 마치 마음속에 한참 박혀 있던 상처로 뭉쳐진 결석이 쇄석기로 분쇄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진지해지기를 반복하며 우리만 아는 딸의 모습들을 끝없이 나눴다. 교실에서는 누구보다 뾰족함 없이 무난하고 순둥 하게 잘 따르던 내 아이는 내면에서는 어떤 전쟁을 홀로 감당하고 있었던 걸까.
“너희는 내색 안 하지만, 여전히 많이 아플까 봐 걱정 돼.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은 우리 가족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했어.”
“보여주긴 뭘 보여줘.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있으면 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아서 이겨낼 거야.”
Y는 "누나 걱정만 하라"라고 농담했지만, 골초인 그는 이제 아지트였던 옥상에서 담배도 못 피우게 되었다. J는 아직 딸이 쓰던 문제집을 버리지 못한 채 학원에 쌓아 두고 있다. 서로 '내 걱정 말고 너나 잘하세요'라며 농담 반 핀잔 반의 말을 주고받다가, 갑자기 진지해진 Y가 내게 물었다.
"그건 궁금했어. 빠르다면 빠른 시간인데, 어떻게 마음을 정리하고 회복해 가는 건지."
지금까지 유쾌하게 대답해 왔던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배가 뜨겁게 꿈틀거리며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엄마로서 미안하고 부족했던 순간은 당연히 많지... 그렇지만 내 온 맘을 다해서 사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거 같아.”
자살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등이 퍼텍트 스톰이 되어 한꺼번에 몰아치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마지막 끈을 놓기 전에>를 읽고 알았다. 그런데 딸의 죽음과 함께, 우리 가족은 '저 집엔 무슨 문제가 있겠지'라거나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딨겠어'라는 의심 어린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사회적 낙인은 고통 위에 또 다른 무게를 얹었다. 김현아 교수는 <딸은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에서 ‘다른 어떤 질환보다 정신질환에 걸리게 되면 그 원인을 개인적인 잘못, 부모의 잘못으로 쉽게 몰아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고 썼다. 이어지는 구절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민과 맞닿아 있다.
"질병의 원인으로 유전과 환경 모두 주요하지만, 유독 정신질환에서는 환경의 영향이 더 크다고 여겨지는 듯하다. 누군가가 우울증에 빠졌다면 우리는 즉각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힘든 일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와 같은 더 심각한 질환을 앓는 사람도 역시 '무슨 무슨 일을 겪은 것이 원인일 것이다 ' '부모가 잘못 키웠을 것이다 ' 같은 반응을 접하기 쉽다."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나는 딸의 죽음 자체만으로도 삶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 견뎌내야 할 고통은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어떤 부모였는지를 증명해야만 하는 사회적 시선까지 감당해야 한다. 딸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예의 바르고 열심히 산 자식을 둔 평범한 엄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떠난 이후, 나조차도 내가 어떤 엄마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 딸을 야단쳤던 어떤 날이, 공부하라고 스트레스 준 어떤 날이, 실수를 꾸짖은 어떤 날이 모여 딸을 죽음으로 내몰았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잡는 심정으로 나는 엄마로서, 그들은 선생님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서로가 서로의 노력을 알고 있기에, 나의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는 대답에 우리는 열네 시간 만에 사실은 참고 있던 울음을 결국 터트렸다. 새벽 네 시에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고 울었다. 우리만 아는 우리의 서사가 아프고 서러워서, 그렇게 떠나버린 어린 영혼이 가여워서, 오랫동안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눈물 속에 서 있었다. 그러다 우리답게 또 웃음이 터졌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Y야,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였어. 딸을 잃은 엄마로 동정하는 게 아니라, 본연의 나로 바라봐 주고 이 시간을 함께 견뎌줬기에 가능한 거였네. 그 길, 같이 걸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