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학 활동의 시작과 끝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고, 이는 내 안에 있는 세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형태와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연관되고, 재창조되고, 만들어지고, 재구성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널 보낸 용기>는 저의 이야기라서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와 가족이 겪은 이 아프고도 특별한 경험을 기억하고 싶었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나쁜 기억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슬프고 애틋한 서사가 사라지는 것이 맞는지 고민이 되었어요. 애도의 시간이 지나면 딸이 잊힌다는 것이 쓸쓸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1887 여름, 빈센트 반 고흐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저 역시 지금보다 훨씬 더 불행했을 거예요. 글이라는 것은 참 신기해요. 얼마나 내가 불행한지를 쓰다가,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딸이 어떻게 이렇게 떠나냐며 비통함을 쓰다가, 아이의 마음에 다가설 수 있었어요. 처음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이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딸의 또래들과 생과 사의 경계를 경험하신 분들이 자신의 경험과 딸의 마음을 알려주셨어요. 자녀나 형제를 잃은 유가족들도 그 깊은 아픔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11화부터는 ‘나의 이야기’를 넘어 ‘시대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제 글은 더 이상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1889년, 고흐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양극성 장애(조울증)와 발작 증세로 입원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35년 전에도 정신질환은 존재했고 치료를 위한 전문병원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정신질환은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병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지만, 그 표현이 얼마나 가볍고 부정확한지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이 오래된 질병을 더 깊이 이해해야 하고, 그 심각성에 대해 공동체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열일곱 딸을 떠나보낸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게 저의 전부일까요? 글을 쓰면서 저는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동기들은 다 졸업하고 떠난 대학교 5학년때, 과 학생회장을 맡았던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저의 모습이에요. 다들 취업 걱정에 몸을 사리는 졸업을 앞두고, 저는 과외 세 개씩 뛰며 후배들에게 술과 밥을 사 주던 회장 언니이자 누나였죠. 그 시절 덕분에 지금까지도 인생 동지들이 제 곁을 지켜주고 있어요.
그리고 또 4녀 1남 중 막내인 시몬스를 겁 없이 사랑하고 결혼한 저돌적인 소신녀이기도 합니다. 자유분방한 딸이 대가족의 며느리가 된다는 걱정에 아빠가 “대식구인데 괜찮겠니?”라고 물으셨을 때, 저는 희대의 명언으로 아빠를 어이쿠 하게 만들었어요. 빨간 머리 앤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거 같아요!”라고 외치던 목소리 그대로 “식구들이 많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거 같아요!”라고 대답한 골 때리는 딸이었던 거죠. 그 결과, 지금 저는 시몬스랑 절친한 친구이자 동반자로 잘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씩씩함’은 언제나 제 정체성의 중심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에 눌리고, 주변의 시선에 위축됩니다. 유가족이라는 틀에 갇혀 저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렵기도 해요. 그럼에도, 저는 저답게 살아가고 싶어요. 그것이 제가 바라는 삶이자, 딸이 자랑스러워했던 엄마의 모습일 거라 믿습니다.
삶은 계속됩니다. 이 글이 힘겨운 오늘을 견디고 계시는 분들과 아픈 열일곱을 보냈던 분들께 작은 위로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