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점심도 거르고 일해야 하나요?
도보 10분 컷의 두 번째 직장은 어르신들의 은퇴 후 삶이 더욱 윤택하고 생산적 이도록 돕는 기관이었다.
생계를 위한 재취업보다는, 살아오면서 쌓인 노하우를 공유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원봉사, 재능 나눔형 일자리를 연계해 주는 노인복지기관.
앞서 말했듯 처음 지원했던 곳은 노인일자리사업 전담기관인 시니어클럽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실버인력뱅크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오히려 좋은 기회였고, 나에게 더 맞는 일이었다.
시니어클럽에 오시는 어르신들은 말 그대로 일자리, 생계를 위한 취업을 위해 오시는 분들이 많았지만, 내가 근무했던 실버인력뱅크는 본인의 능력을 좀 더 발휘하고, 이를 다시 활용해 지역사회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어르신들의 마음가짐, 직원과 대상자를 대하는 태도도 두 기관은 조금 달랐다. 시니어클럽 어르신들 보다 실버인력뱅크 어르신들이 좀 더 인자하고 여유롭고 퐁당한 느낌?
또다시 신규 막내 사회복지사로서의 도전을 시작한 나에게 맡겨진 업무는 60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노인자원봉사단을 이끄는 것이었다.
자원봉사라 하면, 동네 쓰레기를 줍거나, 교통정리를 하는 등 단순한 일만 생각했었는데,
자원봉사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는 활동 주체의 특성을 고려해서 자원봉사 프로그램도 개발해야 했다.
삶의 지혜와 노하우가 켜켜이 축적된 어르신들이 할 수 있는 자원봉사는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개선이나 교통지도 봉사처럼 단순 노력봉사 보다 그들의 재능과 경험을 활용하는 일이라면 1석 2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60년을 온전히 살아낸 ‘노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활동은 미래세대를 지원하고 지혜를 전파하는 ‘재능 나눔’ 형 봉사가 아닐까.
내가 근무했던 실버인력뱅크에서는 이미 어르신들에게 맞는 자원봉사 모델을 개발해 다양한 봉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구연동화 봉사를 하는 동화 봉사단,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의 공부를 돌봐주는 학습 봉사단, 문화해설봉사단 등 다양한 봉사단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기 많은 봉사단은 바로 마술 봉사단이었다.
예전에는 단순히 주기만 하는 봉사였다면 이제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평생교육프로그램에, 그 배움을 나누는 자원봉사활동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나 할까?
마술이라는 분야가 흥미로워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이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터에서 공연까지 할 수 있으니 성취감도 들고, 어린이집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과 재미를 선사할 수 있으니 1석 2조의 봉사단이었다.
이런 마술 봉사단이 연말 연 1회 진행되는 산타봉사단과 합심하면 그야말로 화룡점정.
이상하고 신기한 마술과, 있는 듯 없는 듯 알쏭달쏭한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는 어린이들의 흥미를 자극하는데 충분했고, 매해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특별활동을 고민하는 어린이집 선생님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아빠 산타가 출연해야 하는 부담을 줄여두는,
그야말로 모두가 원하는, 누구나 원하는 봉사단!
하지만 이렇게 인기 있고 모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백업이, 누군가의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복지관 담당자들만 알 뿐....)
노인자원봉사단 운영을 맡고 어르신들과 하하 호호 그저 신나게 일하고 활동하던 시기를 지나 바로 그 산타할아버지가 오셔야 하는 연말시즌이 돌아왔다.
한 명의 산타를 파견하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가지의 사전 준비작업이 필요했다.
산타할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하고 그냥 보낼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산타 한 팀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가지의 단계가 필요하다.
첫 번째, 산타할아버지, 어린이집 수요처, 이동봉사단을 모집한다.
산타역할을 할 산타 할아버지와 산타할머니를 모집하고, 산타가 필요한 어린이집 수요처를 모집한다.
산타를 모셔가는 루돌프는 없지만 이동봉사를 지원해 줄 택시 봉사단을 섭외해서 루돌프 역할을 맡겼다.
두 번째, 산타할아버지를 교육한다. 노래, 율동, 표정부터 몸짓, 등장 시나리오까지!
산타할아버지들이 각 어린이집에서 진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직접 짜 드려야 하고,
어떻게 입장하고, 어떤 말씀을 하시고, 아이들과 어떻게 교감하는지, 우는 아이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시나리오를 짜야했다.
세 번째, 산타 짝꿍을 정한다. - 1차 위기다
이때부터 지끈지끈 골머리가 아프다. 모집된 산타할아버지들은 2인 1조로 파견된다. 그런데 짝꿍을 정하는데 한세월이다. 서로 하고 싶은 분들끼리 하세요~ 뒷짐 지고 있기엔 처음 오신 신규 산타들이 서먹하고, 강제로 짝을 지어버리기엔 반발이 만만치 않다. 겨우겨우 설득하고 양보하고 애원(?)해서 짝꿍 매칭이 끝나고 나면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신규 직원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퇴사한 적도 있다.)
네 번째, 산타할아버지와 파견처, 그리고 루돌프 이동 봉사자를 매칭한다. - 숨 돌릴 틈 없는 2차 위기다!
크리스마스 당일은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산타 파견은 보통 23일, 24일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연히 많은 어린이집에서는 24일에 산타할아버지가 오시길 바랐지만 제한된 인원이 24일에 모든 수요처를 방문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수요처와의 일정 조율은 그나마 쉬운 편. 산타들은 그들이 가고 싶은 어린이집이 따로 있었다. 소규모 가정어린이집보다 큰 국공립 어린이집, 그리고 먼 곳보다 가까운 곳!
이제는 2인 1조가 된 산타 그룹 덕분에 두 산타가 합심해서 반발한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루돌프 봉사자라도 모자란다면 그날 나는 거의 초주검 상태.
어린이집에서 기관으로, 기관에서 또 다른 지역아동센터로 내내 산타들을 실어 나르고 모시는 일에 진이 빠질 지경이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이고 그 어떤 봉사단 활동보다 활동자도 수요처도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포기할 수 없는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다섯 번째, 우리 동네 산타할아버지가 오셨어! 발대식을 끝으로 산타 활동이 시작된다. (발대식은 또 발대식대로 얼마나 일이 많은지..)
그렇게 정신없는 산타학교 일정을 마친 다음날, 여전히 산타학교의 여파로 녹초가 된 내게 아직 끝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바로 산타복을 세탁하고 내년을 위해 잘 보관해 두는 것.
당시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출장과 업무지원을 위한 승용차량이 3대 정도 있었는데, 다양한 기관이 함께 근무하고 직원이 많다 보니 항상 차량을 예약하기 위한 눈치작전이 치열했다. 근무 시작 전 출장계획에 따라 차량 예약을 하고, 예약한 시간 안에 꼭 복귀해서 차키를 다음 예약자에게 인계해야 한다.
우리 동네 산타들이 모두 활동을 마친 다음날,
연계된 세탁업체에 산타복 세탁을 맡기기 위해 반드시 반드시 차량이 필요했다. 이런 나의 사정을 모두들 알고 있었기에 먼저 차를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셨고 점심시간 전까지 복귀하기로 하고 출장을 나갔다. 산타복이 한두 벌이 아니라 두 곳에 나누어 세탁을 해야 했고 어쩌다 보니 점심도 못 먹고 2시쯤 복귀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끝없이 울리는 휴대전화.
복귀시간이 늦어 다음 출장자가 차가 없어 출장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복귀했고, 직원에게 차키를 넘기며 연신 미안하다 사죄했다.
그러고는 팀장님께 불려 갔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거야?
기관 차는 다 같이 쓰는 건데 복귀시간 늦으면 어떡해?
직원들이 얼마나 곤란해했는 줄 알아?
순간,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늦은 것도 맞고, 약속시간을 못 지킨 것도 맞다.
예약 시간을 좀 더 넉넉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100% 내 잘못이었다.
그런데 그때 난 연속한 큰 행사를 혼자 치르느라 너무 힘들었고, 이제 고작 1년 차 사회복지사였다.
더구나 추운 겨울 점심도 먹지 못하고 종종거리며 내내 외근하고 돌아왔는데 기다리고 있는 건 수고했다 한마디가 아닌, 질책 열 마디.
빨갛게 얼어붙은 얼굴로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저 밥 좀 먹고 오겠습니다.’
그 길로 나가 진짜 밥을 먹으러 갔다.
집으로.
10년이 훨씬 넘은 그날의 감정이 이렇게 생생히 되살아나는 걸 보면 그때 단단히 억울하기도 했었나 보다.
내가 외근 중에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얼마나 추웠는지, 산타복 80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다른 직원들은 알 수 없었지만 난 알아주길 바랐고,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다.
무엇보다 일을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되는데 피치 못하게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직원’의 입장에서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고, 인력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피해를 끼쳐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해 버린 것까지 그 직원, 나의 책임이었을까?
근무시간 8시간 동안 해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산타학교처럼 외부행사라도 있는 날에는 그야말로 ‘손’이 모자라 난리다.
왜 점심도 거르고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전날부터 연달아 있는 연말 행사에 혼이 나가도록 일을 하고서도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은 왜 온전히 그 직원의 몫이어만 했을까?
사회복지현장을 떠난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 가지만 지금도 그 현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 장담한다.
산타 할아버지는
내가, 우리가, 사회복지사가, 점심도 거르고 일을 해내야만 하는 현실 속에 있다는 걸 알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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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를 꾸중했던 팀장님은 늦게 복귀한 나를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
추운데 밥도 못 먹고 혼자 끙끙거리면서 일하고 들어왔는데, 팀장이라는 사람이 알아주기는커녕 서운한 소리만 해서 속상했지?
다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잘못한 점을 정확히 알려줄 필요가 있어서 그랬어.
평소 같았음 굳이 밥을 먹으러 가겠다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땐 너무 억울해서 그랬던 거지?
팀장님 말씀도 맞는 말이다. 다른 팀원, 다른 기관과 함께 있었던 회사의 특성상 내 팀원의 잘못은 곧 팀장의 잘못, 우리 기관의 잘못이기 때문에 잘못된 점을 먼저 질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리자도 되어 보고, 공무원도 되어 본 지금은 백번 천 번 이해하고, 나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마지막엔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너.. 꼭.. 너같이 당돌한 신규직원 만나야 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