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 준다는 것

사랑

by 박선희

고등학교 때 아빠가 하던 사업이 망하고 우리는 살던 집에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삿날은 평일이었다. 학교 끝나면 전화해,라고 엄마가 말했다. 그날 체육대회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하루 종일 뛰고 응원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너무 지친 나는 이사 간 집이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엄마가 알려준 낯선 곳까지 버스를 타고 와 내렸다. 엄마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엄마가 먼저 와 있었다. 집은 어디야? 어때? 내가 물어도 엄마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육교를 건너고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그 골목 주위의 집들이 너무 낮고 볼품이 없어 마음이 철렁했다. 여기야,라고 엄마가 말하고 먼저 들어가는데 나는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기라고? 따라 들어가기 싫었다. 이 집에서 앞으로 살아야 한다고? 나는 그날 엄마에게 철없이 짜증을 내며 엉엉 울었다.


한동안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 싫었다. 내가 그 골목으로 들어가는 걸 누가 볼까 봐 싫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가도 되냐고 물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거절했다. 그 집에서 행복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우리는 곧 단칸방에도 익숙해져서 불 끄고 누운 밤, 다섯 식구가 모두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장점이라며 꼭 흥부네 가족 같다고 깔깔댔었다. 그렇지만 그건 우리만의 행복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감추고 싶었다.


그 집에서 4년을 살았다. 대학에 들어가 남자 친구를 사귀었는데 데이트를 하고 나면 자꾸 집에 데려다준다고 했다. 나는 한사코 싫다고 했다. 남자 친구는 서운하다고 했다. 그래도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 친구와 내가 만취를 해서 학교 선배가 차로 집 근처까지 데려다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취했었는데도 나는 끝까지 집을 알려주지 않았다.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남자 친구를 뿌리치고 혼자 집으로 왔다.


며칠 후 남자 친구가 편지를 줬다. 그 편지에는 자기가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쓰여 있었다. 더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도 쓰여 있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다고, 괴로움, 기쁨, 쓸쓸함, 자조 그게 무엇이든 모든 걸 함께 나누고 싶다고, 네가 너무 좋다고, 너무 사랑한다고도 했다. 꼭 선희한테 장가갈 거라고, 선희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면 뗑깡을 부려서라도 꼭꼭 선희한테 장가갈 거라고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남자친구의 사랑

술김에 쓴 편지라 연습장을 쭉 찢어서 꼬깃꼬깃 접어준 것이었지만 그 어떤 고운 편지지에 쓴 것보다 귀했다. 오래오래 갖고 다니며 때때로 펴봤다. 그 편지를 쓴 이유는 한참 후에, 정말로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그날, 엄청 취했으면서도 끝까지 집에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 차가 멈추니까 내리더니 막 뛰어가더라. 걱정이 되어서 나도 내려서 막 쫓아갔지. 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막 뛰어가더라. 내가 불러도 모르고 뛰어가더라. 그렇게 취했는데도 누가 쫓아올까 봐 너무 열심히 뛰어가더라. 그러다가 봤어. 니가 집으로 들어가는 거. 그날 너 들어가는 거 보고 골목을 돌아 걸어 나오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


2년 후엔가, 내가 더 이상 그 집에 살지 않게 되었을 때 남자 친구는 그제서야 나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혀 몰랐으니까, 나는 정말 놀랐다. 왜인지 눈물이 났다.


남자 친구는 그날의 편지에 썼던 것처럼 꼭꼭꼭 나에게 장가를 와서 남편이 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불쑥 그때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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