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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Feb 03. 2024

미영언니의 양심선언

코끼리가 내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밖으로 귀를 대보았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이 방 저 방을 뒤졌다. 소리를 지르는 방향은 보일러실이다. 우워엉-. 보일러가 우는 소리를 냈다. 


다음 날 보일러 수리기사가 오전 11시에 오기로 했으며 나는 기다렸다. 띠잉동-. 중문을 열고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모자 쓴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보일러 수리기사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나는 "네,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인사를 하고 보일러 수리기사님을 집으로 들였다.

기사님은 나의 안내에 따라 보일러실에 들어가 배가 아픈 소리를 내는 보일러의 뚜껑을 열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기사님이 보일러를 뜯어 살펴보는 동안 기사님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보일러실 밖에서 앉아있기도 하고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기를 기다렸다. 20분 정도가 지났다. 기사님이 나를 부른다. 

"자, 여기를 보세요." 그렇게 시작한 설명이 길게 이어졌지만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고 '점화불량'이라는 말만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수리하는데 1시간 정도가 걸릴 것 같다는 기사님의 말에 수리비를 물어보고 이야기를 마치려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 식사를 하고 시작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나갔다 온다는 기사님을 설득해 집에서 배달음식을 먹기로 했다. 기사님과 나는 스파게티를 먹기로 했다. 


20분 후에 스파게티가 도착하여 식탁에 펼쳐놓고 마주 보고 앉았다. 기사님은 스파게티 위에 뿌려진 치즈가루를 보고 한참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내가 기사님께 "기사님 왜 안 드세요?"라고 물었다.

"아, 예전에 중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나서요. 아니면 더 어렸나. 갈수록 기억이 흐릿해져요." 내가 호기심이 생겨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기사님은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눈이 펑펑 오는 날에 친구집에 놀러 갔어요. 친구 이름이 정은이었는데요, 집에 피아노가 있더라고요. 작은 단독주택이었는데 구옥이라 열면 드르륵 소리 나는 연갈색 창틀 있어요, 고객님 잘 모르실 수도 있어요. 피아노 뒤에 그 창문이 기억이 나요. 정은이가 피아노 몇 곡도 쳤고요. 둘이 앉아서 그렇게 별 것도 아닌데 재밌더라고요. 피아노 치고 놀다가 정은이 방에 들어갔는데... 이상한 게, 정은이 집에 거실하고 피아노는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정은이 방이 기억나지 않아요. 이런 얘기 고객님한테 하기 좀 우스운데, 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건을 훔쳤어요. 저희 집이 엄청 가난하지는 않았는데 엄마가 한 번도 장난감을 사준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정은이 방에 있던 스노볼이, 그거 아세요? 지금 생각하면 허접했거든요, 분명히? 그런데 어릴 때는 뭔가 갖고 싶으면 번쩍번쩍 빛나는 것 같은 거요. 그 스노볼이 보석처럼 너무 빛이 나는 거예요. 뭐에 홀린 듯이 가방에 넣었어요. 집에 오는 동안도 물건을 훔쳤다는 두려움이랑 빨리 꺼내보고 싶은 두근거림이 섞여서 얼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던 거 같아요. 집에 와서 자세히 들여다봤어요. 하얀 눈밭에 빨간 지붕을 한, 집 한채만 서있는 거였어요. 흔들면 눈발이 빙글빙글 요란하게 날렸어요. 너무 재미있고 근사했어요. 몇 번을 흔들어서 보고 또 보고 했어요. 하... 그런데 몇 번 가지고 논 다음에 생각해 보니 다음 날 학교 가기가 영 불편한 거예요. 무서웠어요. 정은이가 눈치챘을까 봐.


식사가 끝났다. 정신없이 기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라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36분이 지나갔다. 놀란 기사님도 다음 스케줄 때문에 부랴부랴 자리를 정리하고 보일러실로 향했다. 기사님 말대로 1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 보일러 수리가 끝났고 테스트도 하고 마무리되었다.


둘째가 1학년이 되었다. 봄이 되어 개학 후 며칠이 지나 공개수업 일정이 있어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다행히 첫째 때와 달리 글씨도 곧잘 쓰고 발표도 제법 떨지 않고 하는 걸 보니 안심이 되었다. 문가 근처에 서서 우연히 창가 쪽에 서있던 모자를 쓴 엄마와 눈이 마주쳤는데 아는 얼굴이었다. 누군지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을 굴려보니 보일러 기사님인 게 번쩍 떠올라 다시 쳐다보았다. 기사님도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공개수업이 끝나고 학부모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특별히 안면이 있는 학부모가 없기에 바로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 쳐서 돌아보니 기사님이었다.


학교 후문에서 5분 거리에 새로 생긴 카페 <릴렉세이션>에 기사님과 함께 들어갔다. 기사님과 나는 서로 신기하다고, 반갑다고 웃었다. 보일러는 괜찮냐고 물으시기에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기사님은 40대 후반이라고 이름은 김미영이라고, 오늘 공개수업을 한 아이는 셋 째라고 소개했다. 나도 비슷하게 나의 신상을 제공하고 주로 아이들 이야기로 수다를 때우다가 예전에 기사님이 했던 이야기를 슬쩍 물어보았다. 

"언니, 그때 언니가 집에 피아노 있던 언니 친구 얘기했었잖아요. 그리고 어떻게 됐어요?" 언니가 되어버린 기사님은 광대뼈를 올려 눈을 가릴 만큼 가늘게 눈으로 웃었다. "아, 정은이 얘기? 그때 엄청 학교 가기 싫었지. 근데 안 가면 엄마한테 엄청 혼나니까 어쩔 수 없이 갔지. 교실에 들어갔더니 정은이는 아직 도착 안 했더라고. 그리고 그냥 교과서 대충 펴놓고 앉아있는데 정은이가 와서 평소랑 똑같이 말을 거는 거야. 속으로는 진짜 떨렸는데 겉으로는 티 안 냈어. 그리고 아마 3학년 돼서 헤어진 건지, 고등학교 1학년 가느라 헤어진 건지, 마지막에 정은이를 본 기억이, 같이 노래방에 갔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노래방에 가본 거야. 너무 재밌었어. 나는 집순이라 나가서 노는 거 별로 안 좋아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정은이가 나한테 잘해줬어. 적극적이고. 공부도 잘했어. 정은이, 부반장인가 그랬거든. 하여간 그렇게 노래방 간 게 마지막이야." 언니는, 예전에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클래식 기타 학원을 하다 잘되는가 싶더니 별로였다는 이야기, 결혼한 이야기, 남편과 애들 얘기로 깔깔거리며 떠들다 언니도 학부모들과 별로 어울리는 일이 없다고 하고 나도 워낙 엄마들과는 친해지기 어려운 집순이라 시간 있을 때 가끔 만나자고 약속했다.


언니에게 가끔 문자가 왔다. 첫째는 고3이고 둘째는 이제 중학생이 되어서 너무 정신이 없다고 한다. 나는 괜찮다고 언니가 시간이 날 때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답장을 했다.


11월이 되어 난방을 하기 위해 보일러를 켰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보일러 소리를 듣고 언니 생각이 났다. 채린아 준이 잘 지내? 요새는 준이랑 잘 안 놀아? 내가 미영언니 아들 안부를 물었다. 채린이가 “왜?” 하고 물었다. 내가 "그냥." 그러니까 채린이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준이 며칠 전에 선생님한테 혼났어. 우리 반 규칙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주워서 노란 통에 넣어야 하거든. 근데 준이가 에크몽 지우개 주워서 자기 필통에 넣었는데 지민이 거였어. 그래서 준이 선생님한테 혼나고 엄마한테도 엄청 혼났대."


아이들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간절히 기다렸다. 평소에는 교회에 가도 기도를 잘 안 하는 아이들이지만 이번엔 눈이 오는 성탄절이 되게 해달라고 가부좌를 틀고 엄지와 검지를 붙이고 기도했다. 이상한 기도가 이루어졌다. 성탄절에 눈이 왔다. 성탄예배를 드리기 위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갔다. 아이들이 성탄 선물을 받고 나오는 길에도 눈이 펑펑 오고 있어 잔뜩 신이 났다. 남편도 즐거운 얼굴이다. 교회 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집순이인 둘째가 차가 막히지만 눈이 오기 때문에 기분이 좋다고 쉬지 않고 떠들었다. 평소에는 평범한 길이었는데, 눈이 오니 거리가 특별하게 보였다. 온 세상이 재미있고 근사했다. 집 근처에 거의 도착했을 때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각선 방향에 버스정류장 뒤로 성당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로 인사도 하고 눈이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 띈 얼굴이었다. 걸어 나오는 사람 중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미영언니였다. 언니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이 오는 거리를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미영언니를 감싸고 빙글빙글 돌았다. 언니가 빙글 대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사람은 미영언니를 닮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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