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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Mar 23. 2024

별명

털대리!

허 차장이 김 대리를 부른다.

아 씨... 쪽팔려.

털대리! 안들~리~나~요? 털~대리~

등을 돌리고 복사기 앞에 서있던 대리 김철민이 얼굴 표정을 고치고 뒤돌아 대답한다.

넵! 대리 김! 철! 민! 부르셨습니까!?

히히. 난 또 우리 털대리 화난 줄 알았잖앙.

캬~ 캬~

차장 허정무가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눈썹, 삐져나온 코털과 솜털이 무성한 김철민 대리를 위아래로 훑으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차장 허정무는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사원들을 부를 때 별명을 부르기를 선호한다. 김철민은 허정무 차장이 뭐라고 부르건 직장 상사의 호명이기에 있는 힘껏 참았지만, 허정무가 부르기 시작한 별명 때문에 같은 기수며 아래, 위 할 것 없이 자신을 '털대리'라 부르게 된 것에 침통한 심정이었다.

털대리!

털대리님.

어이, 털대리.

대리 김철민은 여린 성격이라 나오는 눈물을 간신히 참다가 자기 집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울음을 터트리고는 했다. 누구에게나 본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눈이 크면 왕눈이가 되고 눈이 작으면 단춧구멍, 코가 크면 코주부, 입이 크면 하마, 대머리는 대머리.

김철민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해, 유독 그 몸에 털이 왕성하게 번졌다. 어린 김철민이 벌초에 집착할수록 털은 더욱 빳빳하고 강력한 군집을 이루었다. 길게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교, 군대, 사회에서 김철민은 털보, 머털도사, 김털민, 김털, 털맨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어이, 털대리! 오전 11시. 허 차장이 김철민을 부른다. 

털대리, 오늘 점심으로 뭐 참신한 거 없을까? 어제 새벽까지 달렸더니 속이 느~무 안 좋네. 

허 차장의 말을 듣고 김철민이 센스를 쥐어짠다. 입맛이 지랄 맞은 허 차장을 모시고 직원 두 명과 함께 회사 근처 <발리 뮨>에 자리를 잡았다. 속이 안 좋다던 허 차장이 시킨 누런 색깔의 치킨란당을 보니 김철민의 속이 울렁거린다. 각자의 음식을 후후 불어가며 절반의 식사가 끝났을 때쯤 허 차장이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낸다. 

헉! 이거 뭐야, 아 씨… 

허 차장이 김철민을 쏘아본다. 영문을 모른 채 김철민과 직원들이 허 차장의 눈을 좇아 시선을 옮겼다. 허 차장의 치킨란당 속에 꼬불거리는 5센티미터 정도의 털이 촉촉이 젖어있다.


화요일 점심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허 차장의 놀림이 이어졌다. 김철민이 온몸으로 부정해 보아도 허 차장은 멈추지 않았고, 직원들의 눈초리마저 수상하다. 허 차장의 괴롭힘이 도를 지나쳤다. 김철민의 한계가 바닥났다. 김철민이 숯이 별로 없는 허 차장의 머리칼을 붙잡았다. 허 차장도 재빨리 김철민의 빳빳한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한바탕 몸싸움을 벌였다. 양 부장이 허 차장을 불러들였다. 다음 차례는 김철민 대리였다. 김철민은 그 길로 짐을 챙겨 회사를 뛰쳐나왔다.


그날 밤, 티켓팅을 하고 짐을 꾸렸다. 이틀 후, 발리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집에 있는 가장 깊은 모자를 눌러쓰고 멍든 눈을 선글라스로 가린 허 차장이 새벽부터 집을 나선다. 길게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교, 군대, 사회에서 허정무의 별명은 대머리였다. 회사에서 허 차장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불릴 일도 없이 허정무는 허 차장 아니면 대머리였다. 기내에 화장실에 들러 모자를 벗어보았다. 털대리에게 긁힌 두피에 손톱자국이 세 줄 보였다. 오른쪽 눈가에 파랗고 노란 멍이 퍼져있었다. 머리카락이 더욱 휑하다. '아, 개새끼…....' 양 부장 앞에 가서 억울하다며 울며불며 사정해서 일주일 휴가를 얻었다. 이 참에 실컷 놀아보자. ‘이 새끼 내가 뭘 얼마나 그랬다고 이지경을 만들어놨냐, 어휴.’


발리에 도착한 허정무는 갑작스럽게 부딪친 뜨거운 열기에 대학 때 짝사랑 했던 유정누나가 떠올랐다. 

이유정은 허정무의 선배였다. 두 살이 많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잡다한 아르바이트로 수업시간 때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알바 리'였다. 장마진 여름, 정무와 딱 한번 술자리에서 만났다. 발리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던 유정의 눈에 눈물방울이 고였다. 정무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허정무의 대머리는 대학 때부터 유명했다. 유정과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유가 털 때문은 아니지만 정무의 가슴 한편은 그런 추측으로 늘 시렸다.


정무가 울루와뚜 사원으로 향했다. 훤히 드러난 다리를 보라색 천으로 가렸다. 사원을 둘러보았다. 돌로 지어진 사원과 자유스럽게 깔린 돌을 밟으며 사원 전체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갔다. 발바닥에 닿는 돌덩이들처럼 존재가 가벼워졌다. 마지막 일정으로 <케착댄스> 공연을 보기 위해 원형으로 마주 보고 있는 돌계단 끝줄에 앉았다. 전통적인 복장과 요란한 분장의 배우들이 리듬에 맞추어 등장했다. 라마왕의 아내 시타는 마왕 라비나에 의해 납치된다. 시타를 구하기 위해 라마와 전투를 벌이는 과정과 안무가 이색적이다. 절정으로 다다른 춤사위 뒤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정무의 눈꺼풀이 깜빡이지도 않고 왕의 아내 시타를 바라본다. 시타와 눈이 마주쳤다. 정무는 공연 내내 시타만을 바라보았다.


정무는 시타와 연인이 되었다. 시타의 이름은 꼬망이라 했다. 정무는 꼬망을 위해 발리에 정착했다. 곧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밤, 꼬망은 정무의 빈약한 머리칼에 키스했다. 꼬망이 정무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다. 정무의 머리카락을 자라게 할 약초를 캐기 위해 바투르산에 올랐다. 절벽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약초를 지키는, 온몸이 털로 가득해 눈동자만 간신히 빛을 내는 거인이 꼬망을 가로막았다. 

“네가 감히 수 천년을 키워 온 나의 약초를 가져가겠다는 것이냐. 용기가 가상하구나. 네가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고, 땀이 피로 변하면 너에게 약초를 주겠다.” 꼬망이 엄지발가락을 세워 몸의 중심을 가다듬고 정신을 불어넣어 춤의 리듬 안으로 빠져든다. 발바닥이 돌과 흙을 쓰다듬었다. 여린 허리와 골반이 튕겨져 나올 듯 흔들렸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꼬망의 발에서 피가 난다. 코피가 나왔고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바투르산의 화산이 폭발함과 동시에 꼬망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공연이 끝났다. 박수가 쏟아졌다. 배우들의 몸에서 땀이 흐르고 가뿐 숨을 들썩인다. 정무도 눈을 뜨고 시타를 향해 박수를 쳤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발리특산품을 샀다. 잠자리에 눕기 전 약초를 머리에 발랐다. 잠자리에 누운 정무의 눈이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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